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여 보라
고린도후서 13:5
(여는 말)
최근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들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교인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인터넷 등에는 안티크리스찬의 글들이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해악을 끼친다는 주장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요즈음처럼 나쁜 적은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 이래 없었습니다.
최근에 또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善終)을 하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위대한 인물이 죽으면 선하게 죄 없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쳤다는 뜻으로 선종이라고 합니다. 추기경의 장례식에 40만 명의 추도 인파가 밀려들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사실 많이 부러웠습니다. 개신교에도 저렇게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개신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에 천주교는 급격히 숫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적 인식이 훨씬 좋습니다.
이러한 위기적인 상황은 이민사회도 별반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왜 이런 위기를 맞게 되었을까요?
얼마전 어떤 청년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키위 청년 하나가 최근(3년전)에 개종을 하여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크리스찬이 되어 예수님을 믿은 후 과거의 자신의 행동과 말, 생각들을 돌이켜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다짐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의 의문이 있는데, 한국인 친구들은 교회 다니고 스스로를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면서도 입에 욕설을 달고 있고, 술 먹고, 나쁜 행동을 다하면서도 조금도 마음에 거리껴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한국교회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고 묻더랍니다.
사실 이게 한 두명의 청년들의 문제일까요? 사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예수를 믿어도 꼴 보기 싫은 사람 피한다고 이 교회 저 교회 헤매며, 예수 믿어도 여전히 한두 푼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고 거짓을 택하며,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작은 일에 상처받고 상처 주며,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작은 시련에 낙심하고 좌절하며 절망하고 주저 앉아 울부짓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래도 한국교회에서는 괜찮습니까?
1. 시험해보라.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이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해보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합니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버려진 존재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 안에 있지 않다면,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버려진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그의 권면을 받고 있는 수신자는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모여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봉사하며 이른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을 참고해보면 그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이름을 부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바울 사도가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음 안에 있습니까?
저도 때로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믿음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십니까? 믿음 안에 있는 사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라고 물으면 대체로 선뜻 대답을 못하셔요. 그러기를 바라지만 스스로 겸손하게 생각해서 자기의 연약함 부족함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거짓 그리스도인?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무조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다면 반드시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천국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이라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다니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하는 등등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버려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자기 시아버지가 장로님이신데 진심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냥 교회 다니면 유익한 교훈도 많이 얻고 자녀들이 착하게 되고 그래서 득 될 것이 많아 교회에 다닐 뿐이시라고 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누가 아프거나 해서 ‘기도하자’고 하면 그런 것은 다 미신이라고, 할 필요 없다고 하신답니다. 그래도 그분은 교회의 장로가 되셨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분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분이 버림받았다면 본인은 별로 억울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구원받고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어떤 기대조차 하지 않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버림받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깝겠습니까?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인생인줄 알았다면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살다가 죽을 것을....
그러므로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된 자리에 있다면 즉시 되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믿음 안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입니까?
2. 믿음 안에 있는가?
그러면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는 말,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Savior)로 영접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구세주로 영접한다’는 말은 우리가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죄의 노예 상태일 때, 그분이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풀어내어 해방시켜 주셨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지배에 놓여있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크게 보아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책감,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Lord)로 영접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찬은 기도할 때 예수님을 주님, Lord, 주인님으로 부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신다면, 내가 놀든지, 일하든지, 잠자든지, 하는 등등의 나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예수님의 바라시는 대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내 생각과 감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합니다. 내 인생, 시간, 성격, 달란트, 에너지, 등등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겠다는 결단과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별기의 일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로 귀착이 됩니다. 우리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몸값, 곧 속전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서 새로운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진리 안에서 자유를 주심으로 우리를 노예 신세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3. 열매로 나타나는 신앙
우리가 믿음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실제로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결국 열매를 통해서 판별하게 됩니다. 앞서 보았듯이 믿음은 교회 생활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그분의 입장에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반드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삶에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집트의 피라미드 안에서 미이라와 함께 발견된 완두콩 5알을 우리나라 국립임업연구원에서 분양받아 그중 2알의 싹을 틔웠습니다. 무려 3,300년에 이르는 그 오랜 세월동안 아무런 생명의 징조를 나타내지 않고 돌맹이처럼 땅 속에 묻혀있던 이 완두콩에 적당한 온도를 주고 물을 주어 싹을 틔웠습니다. 이름하여 투탕카멘의 완두콩입니다.
3,300년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싹을 틔운 이 완두콩은 그동안 살아있었습니까? 죽어 있었습니까? 죽었다면 싹이 나지 않지요. 생명이 있는 한 적절한 조건을 갖추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 아내가 콩나물을 길러 먹습니다. 그런데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서 보니 자꾸 썩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왜 그런가 하고 들여다 보았더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썩어가는 콩이 보입니다. 콩에 물을 주기 전까지는 똑같았습니다. 썩은 것도 없었고, 싹난 것도 없이 그저 마른 콩이었습니다. 그것을 삶아 먹든 볶아 먹든 밥에 놓아 먹든 아무래도 괜찮은 콩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물을 주었더니 생명이 있는 콩은 싹을 틔웠고, 생명이 없는 콩은 썩었습니다.
만약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적절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삶에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면 똑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 삶이 파괴되고 부패되어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 신앙이란 우리 인생길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들에 반응하는 우리의 태도이고 방식입니다. 곧 그런 일로 나타나는 우리의 인생관이고 세계관입니다.
믿음이란 내 안에 생명으로 계신 예수님의 뜻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서, 매사에 나의 판단과 뜻을 결정할 때,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복종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생길 때 어떻게 하십니까? 자녀와의 사이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어떻습니까? 내 생각과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십니까? 아니면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뜻을 여쭈어보고, 그 뜻에 복종하십니까?
우리 삶의 모든 국면에서 그 원칙을 적용하여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모르는 사람에게나, 우연히 탄 버스에서 만난 운전기사께나, 학교에서 매일 만나는 친구에게나, 내 비즈니스하는 사업체에 찾아온 손님에게나, 누구에게나 내 생각과 감정대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헤아려 행동할 때, 자연스레 우리 삶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열매가 맺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피해를 준 상대를 내가 심판자가 되어 평가하고 판단하고 보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모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죄에 대한 심판자 되심을 믿고 주님께 맡겨버리십니까?
요셉은 형들이 미워서 죽여버리려다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노예로 팔아버려서 이집트에 노예 신세로 끌려갔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나 요셉은 스스로 심판하고 보복하는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나중에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만 해도 보복하려면 할 수도 있는 힘과 지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났을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면 잡아 죽여도 결코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상황에서 자기 감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은 언제나 평강을 누립니다. 큰 걱정 작은 걱정,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은 다 십자가 아래 내려놓습니다. 안절부절 조바심 근심과 염려 다 내려놓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주께 아뢰고,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강 가운데서, 오늘 내게 주신 숙제를 성심성의껏 풀어나갈 뿐입니다.
인생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뒤죽박죽이 되는 것은 내가 믿음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파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파도 앞에서 배가 흔들리는 것은 배가 적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노젓는 유원지의 놀잇배는 10cm 20cm의 파도에도 흔들리고 뒤집어집니다. 배낚시하는 요트는 1m, 2m의 파도에 흔들리고 뒤집어집니다. 수십명의 여객을 태우는 페리는 5m, 6m의 파도에 흔들리고 뒤집어집니다. 수천톤의 화물을 싣는 배는 왠만한 파도에 끄떡도 없지만 파도가 20m, 30m가 되면 파도에 흔들리고 뒤집어집니다. 항공모함이라면, 어지간한 파도나 태풍에도 끄떡없습니다. 배가 흔들리고 뒤집어지는 것은 파도가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배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배가 있습니다. 항공모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참된 평강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세주로, 또한 주인으로 살아계십니까? 그분의 뜻이 당신의 뜻을 다스리십니까? 여러분은 그 믿음 안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것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교회생활에 아무리 열심이 있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기독교의 위기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인지 그 판단조차 하나님께 맡겨버리십시다. 오직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하여 보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순종하시는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