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롬 5:5-11
소망이 부끄럽게 된 때- 무슨 소원을 가졌는데, 황망하게 된 때가 여러분에게도 있었습니까? 제가 아는 권사님은 남대문에서 포목점을 하셨는데 한번은 추석이라서 1억원어치 포목을 사두었는데 불이 났습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찌? 어떤 분은 미국에 딸을 보내 잘 키웠는데 잠간 한국에 와서 삼품백화점무너지는 그 날에 그 딸들이 죽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니더라도 참 황망할 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면, 사람은 부끄러워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이 잘했어도! 바울이 잘했어도! 몸의 가시로 인하여 힘들어 했습니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몸에서 진물이 나고, 가족은 다 죽고, 복음을 전하다가 간질이 발작하면 얼마나 부끄러워졌겠습니까?
뭔가 부족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뭔가 의기소침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몸이 아프셨습니다. 그분은 믿음으로 나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의기소침해 지셨습니다. 건강이 안좋으면 상황에 우리는 쉽게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그 때도 우리는 믿음으로 소망합니다.
교회가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의기소침해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주시지 않는가? 안디옥교회는 왜 어려움이 계속있지? 이것이 소망이 부끄러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움을 당해면 부끄럽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뒤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 일이 잘 풀려지지 않으면 우리 믿음과 소망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면 소망이 부끄럽지 않는 이유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에 의해서 부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교회를 하면서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만들어 내는 줄 압니다. 하지만 환란이 있을 때에 영적인 두려움이 있게 되고, 영적으로 부끄럽게 됩니다. 때로는 인내가 되지 못하고 상처가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환란을 당할 때에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번에 이런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연동�샤에서 우리가 월말이면 나가야 합니다. 이제 10여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려면 이미 다른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사무실도 이미 계약이 되야 이사를 준비하지 않습니까? 참 상황적으로 보면 암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담임목사로써는 너무도 황망하기 그지 없는 노릇입니다. 답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 앞에는 참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심령은 성령께서 부으시는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안디옥을 사랑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는 것은 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부어질 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의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이 애를 써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 대답은 “안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연동의 총경리도 자신과 우리의 관계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애를 쓰고 있지만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족변호사도 어떤 집사님을 통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변호사가 하는 말은 법적으로는 가지 않는게 좋을 거라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돌보심을 소망합니다. 지지난주일 박영대집사님께서 광고를 보시고 예배드린 후 어떤 상황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상황을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 영감으로 뭔가 일을 주께서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총경리를 만나서 다시 대화를 나눴지만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지난 주일에 다시 팀장들과 박집사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 믿음의 스케줄이 있습니다. 기도가운데 나오는 것들입니다. 30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언제 결정타를 날려 주실 것인가? 성령님의 감동을 존중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감동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일이 추진이 됩니다. 저는 기도할 때름이지요!
이번에 박집사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크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셨습니다. 이 장소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에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그 비전에 주께서 때를 따라 돕는 손길을 보내시고 절묘하게 하나님께서 대사님과 박집사님과 교회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 복이 될 줄 믿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에스더가 그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갔을 때에 주께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하셨지 않습니까? 쓰임을 받은 것이지요!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한번 우리 다 축복합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앞에서 참 연약한 자들입니다. 어려움에 서면 참 마음부터가 담대함에서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책임을 돌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나요?
환란가운데서 하나님은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연단하십니다. 그런 낙심을 뛰어넘어, 원망을 뛰어넘어 참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전에는 환란이 오면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앙이 어리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게 하기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교회 이 교회가 복된 교회인줄 믿습니다.
<베어(Bear)>라는 영화를 아시지요?
그것은 엄마를 잃은 아기 곰이 겪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엄마 곰은 죽고 아기 곰은 살아남지만 보는 이들은 그 아기 곰도 머잖아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덩치가 무지 큰 코디엑 곰이 이 작은 아기 곰을 제 새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관객은 이를 보고 희망으로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어느 날 이들은 서로 떨어지게 됩니다. 아기 곰은 아무리 둘러봐도 아빠 곰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때 호시탐탐 아기 곰을 노리던 쿠거란 녀석이 조용하고 민첩하게 다가와 아기 곰 앞에 섰습니다.
아기 곰은 몸을 일으켜 세워 앞발을 들고 으르렁거려 봅니다. 하지만 녀석이 낸 소리는 낑낑 겁먹은 소리였죠. 그런데 쿠거의 얼굴에 갑자기 두려움이 떠올랐습니다. 녀석은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슬금슬금 그 자리를 떴습니다. 그때 카메라는 관객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아기 곰 뒤에는 커다란 아빠 곰이 서 있었습니다. 그 거대한 몸으로 한 방에 아들을 구해 낼 자세를 취하면서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과 내게도 해당하는 진리입니다. 때때로 두려움이 들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결코 그분의 돌보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되는 때입니다.
이 소망이 담대한 이유에 대해서 6절부터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뭘 하셨다고 하십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연약하면, 두려움이 옵니다.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못한 ? 소리내고, 흔들리고, 남원망하고, 비판하고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 때, 부끄럽지만 깊은 감사의 소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다~” 나를 보호하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리라 세상 풍파 험하나, 주님 날 위로하네 나의 능력 되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리라
옳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래도 그를 위해 혹시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을찌는 몰라도,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착한 사람을 위해서 용감히 죽는 사람이 혹시 있을찌 몰라도 내가 죄인인데도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써 어떻게 되야 합니까? 이제 그 죽음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의 진노하시는 일과는 상관이 멀어져야 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씀이지요!
곧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지었을 때, 즉 화목하지 못하고 멀리 떠나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화해의 길을 늘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분리를 깨시고 그 저주가운데서 살으셨으니 이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 뿐아니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몇 해전 월드컵이 있었을 때에 지방을 다녀오느라 사실 중요한 장면들을 보질 못했었습니다. 기차안에서 문자로 누군가가 보내주기도 하고, 중국사람이 가진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황선홍, 안정환이 역전의 드라마를 펼친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장면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신나있었습니다. 거의 다 지게 된 경기에서 역전하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안절부절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태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게임을 결국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 상태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게임은 이미 이긴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영상을 보면서 나의 인생이 마치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저는 구원 얻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긴 게임을 경기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엔 이긴 게임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다 이긴 게임을 포기함으로 패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때가 믿음의 소망을 갖게 하시는 때인줄 믿습니다. 사랑하셔서 환란의 인내를 연단을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그것들을 인내해 나가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고자 합니다. 일이 해결되었는데 왜 새벽기도회를 하자고 하는가 할찌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연동으로부터 통보가 오진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우리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부어 주심을 확신하고 성령의 일꾼이 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전기 플러그가 있고 콘센트가 있습니다. 전구에 불이 들어오하려면 플러그를 콘센트에 꼽아야 불이 들어옵니다. 완전히 접촉되어야 불이 들어옵니다. 가까이 갖다 대도 꼽지 않으면 불은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느만큼 가까이 왔는냐를 얘기합니다. 그것 가지고 내가 더 잘 믿네 못 믿네 한다는 겁니다. 불 안들어 온 것은 똑같은데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플러그를 콘센트에 확실히 꼽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만져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교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치료하시고 하나님 사랑을 부어주심을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우리는 연약하고 늘 죄가운데서 있고 때론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도 있게 됩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우리 힘으로 세상을 살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