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이 정당화 된 나라
반칙하지 맙시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국인 학생이 한 학기 정학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 학생이 선행(先行)학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처럼 부모가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교사는 부모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내용과 권리를 도적질해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의 공정한 경쟁에서 반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국제중학교 이야기로 뜨겁습니다. 이미 자사고, 특목고, 민사고 등 교육의 서열화와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황폐해진 교육현장에 아이들을 맡겨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전에 제가 학교를 다닐 때 예습과 복습을 잘하라고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비결은 바로 예습 복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공부 잘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반칙입니다. 선행학습으로 반칙하고, 참고서도 교사용 참고서를 습득해서 선생님의 눈높이에서 공부하고, 진짜 공부는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비정상적인 교육환경이 이미 대세가 된지 오래입니다. 모두 반칙입니다.
얼마 전 끝이 난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제일 열 받게 만드는 일은 심판의 오심입니다. 심판의 오심은 아름다운 경기를 망치는 가장 대표적인 반칙입니다. 반칙은 선의의 피해자들을 만듭니다. 올림픽에서의 반칙은 훌륭한 선수가 메달을 잃게 만들고, 우리의 삶속에서의 반칙은 열심히 일한 대가를 빼앗아 상실감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공부에서의 반칙은 학생들에게 좌절감을 맛보게 합니다.
선행학습, 참 말은 좋습니다. 제 딸이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아이 엄마는 걱정합니다. 요즘 6학년이면 최소한 중학교 1학년 과정은 선행학습으로 끝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국제중학교에 들어가려면 중학교 과정을 다 마친 정도의 수준의 아이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고요, 자사고나 특목고는 이미 고등학교 졸업 수준의 실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미 해당 수준을 다 마쳤는데, 학교에 뭐 하러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는데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칠 정도의 수준을 가진 학생이 뭐 하러 고등학교에 들어갑니까?
공부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초, 중,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있는 것은 해당 나이에 해당 지적능력을 고려해 배우는데 지장이 없도록 단계별로 학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초등학생이 미분, 적분을 풀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도 못하면서 풀고 있습니다. 이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반칙은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듭니다. 특별히 경쟁구조로 교육을 해온 우리의 교육현장에서 반칙은 이미 여러분들도 경험했듯이 더욱 불합리한 구도를 만들어 냅니다.
인디언을 교육하는 한 선생님이 시험을 보고자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시험을 볼 테니 정신 차리고 똑바로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빙 둘러 앉더랍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는 시험이 있을 때 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도록 배웠고, 그것이 시험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의 조상들은 시험을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 해결하도록 가르친 훌륭한 교육방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사회에는 리더십이라는 말이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목회에서도 리더십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리더십을 배우기 위해 여러 세미나를 다니며 방법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리더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리더십보다는 멤버십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리더십은 멤버십에서 나옵니다. 그 사회와 공동체에 멤버가 되지 않으면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멤버가 되지 않으려 하면서 리더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반칙이지요.
저는 잘 사용하고 싶지 않은 말 가운데, 한국교회가 최근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스스로 자꾸 사용하다보니 주눅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 비판의 원인은 저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멤버가 되는 일에 너무 소홀히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활동을 통해 그 영향력을 멤버가 되도록 계획하고 이끌어 갔어야 하는데, 리더가 되는 일에 리더가 되는 자리를 차지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리더가 되려고 했는데 왜 리더가 없을까요? 바로 먼저 멤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멤버가 되는 일을 더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직사회에서는 리더십보다는 멤버십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멤버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반칙이 없어야 합니다. 반칙은 공동체를 망치고 멤버십을 약화시켜 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맙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삶 가운데서 반칙하지 맙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신앙양심의 반칙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다른 불을 사용하는 반칙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앙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는 반칙을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극장에서 앞사람이 일어서자 뒷사람이 일어서고 또 그 뒷사람이 일어서 결국 모두가 일어서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들 편하게 앉아서 감상할 수 있는데 누구 하나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모두 반칙을 저지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바울의 권면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