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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대한 결단-마리 퀴리]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

뜰안지기 2008. 6. 1. 07:47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두 차례나 노벨상을 받은 여성과학자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녀는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신음하는 가운데 프랑스 파리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소르본 대학 이과에 들어간 마리아의 생활은 몹시 고달팠다. 그녀는 빠른 말씨로 진행되는 프랑스어 강의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추위 속에서 불조차 때지 못하고 차만 마시면서 몇 끼를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해서 1893년, 물리학 학사시험에 1등을 차지했다. 그 무렵 마리는 소르본 대학 물리학 교수였던 피에르 퀴리와 사랑을 나누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공동으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898년 6월 말, 두 사람은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새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아는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poloni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동안 두 사람은 비가 새는 창고 같은 실험실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두 사람은 연구를 계속해서 폴로늄과 함께 우라늄 광석에서 우라늄의 900배에 달하는 방사성원소인 라듐(radium)을 발견했다.
퀴리 부부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학회는 발칵 뒤집혔다. 두 사람은 라듐 연구를 거듭해서 우라늄 광석을 20kg를 분쇄해 황산에 침전시켜 결정을 만드는 고된 작업을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마침내 1902년 두 사람은 순수한 라듐 결정을 추출해냈다. 4년의 세월을 바쳐 8톤의 광석에서 추출한 양은 겨우 0.1g이었다. 그해 11월 퀴리 부부는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녀의 나이 34살 때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어 숨지고 말았다. 그녀는 비탄에 잠겼지만 연구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남편 대신 파리 대학 이학부 물리학 교수가 됐고, 191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해, 노벨상 2회 수상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마리 퀴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방사선 치료반을 조직, 치료에 나섰다. 당시는 아직 엑스선 장치가 없어서 총상을 입은 병사들의 몸속에 박혀 있는 총알의 위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몸에 박힌 총알을 뽑아내지 못해 죽는 군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엑스선을 장착한 진료차를 많이 만들기 위해 정부와 군 당국을 뛰어다니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많은 병원이 엑스선 치료시설을 갖추게 됐고, 수많은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미국의 어느 여기자가 퀴리 부인과 회견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십니까?”
“1그램이라도 좋으니까 연구를 위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라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퀴리 부인의 말을 들은 기자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라듐을 발견한 사람이 라듐이 1그램도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당신은 라듐을 발견한 것으로 특허를 받고 큰돈을 벌어 얼마든지 라듐을 살 수 있지 않았나요?”
그때 퀴리 부인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원소는 만인의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저명인사 중에서 명성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며 퀴리부인을 추모했다.
등록일 : 2006/09/06
제 1606호 2006년09월06일 발행 중소기업뉴스
출처 : 중소기업중앙회
글쓴이 : 경영상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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