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신학
가 - 43
월터 카이저 저
최종진 역
1. 정경의 신학적 핵심을 규명하시오.
에른스트 라이트(G.Ernst Wright)와 폰 라드(Gerhard von Rad), 게르하르트 하젤(Gerhard Hasel)등 많은 현대 구약성경 신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중심점, 내적 통일성 등을 발견할 수 없고 다양성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하르트 하젤(Gerhard Hasel)은 "구약 성경 신학의 최종 목적은 다양한 신학들과 주제들, 개념들을 함께 묶는 내적 통일성의 존재 여부를 비단 그것이 숨겨진 내적 통일성일지라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왜 현대 신학자들이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구약 성경을 대하기 전에 가진 그들의 '전제'에 기인한다. 그들은 '진화론적인 사고'와 '헤겔의 변증법'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와 같이 '이분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구약 성경을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연구를 해서는 안되고 오직 '성경 본문의 일반적인 신학적 형태와 내용에서 저자의 참다운 의도를 재생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즉, 성경 본문으로부터 '귀납 법적'으로 연구되어져야 한다. 성경 기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내용과 선택 행위를 하나님께 돌릴 뿐 아니라 그들보다 이전의 언약과 인물들 그리고 계획들의 축적된 자료에 관련된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 그들은 이 초기 말씀들의 직접적인 상속자들이며 미래에 언약을 성취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보다 큰 진전을 가져오게 하는 공헌 자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주장의 매개체로서 '성경 역사'에 대한 생각에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다. 폰 라드는 구약 성경은 모두 가공된 것이며 해석된 형태의 역사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역사 비평적 방법을 통해서 재구성한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전승적-역사적 방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고백적 역사라고 했다.
이들의 역사 비평은(발티모어 학파, 알트와 마틴 노트를 중심 한 학파, 멘덴홀을 중심 한 학파가 있다) '이원론'이라는 자신들의 잘못된 전제에 의한 것이므로 배제되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본문은 그 진실성이 증명될 수 있거나 연구 중인 본문과 같은 시대의 일반 지역과 관련된 자료와 근거 있는 통계를 산출하는 기록이 좋았던 자료에 의해 제공되는 공개된 통계에 의하여 오류가 판명되기까지는 무흠 하다'고 보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성경 역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에사', '마카사바', '메짐마', '데렉' 등의 단어가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에사'란 말이 있는 미4:12와 시33:10절은 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 주고 있다. 또 사 46:9-11의 말씀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이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선포는 즉흥적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의 중심점 혹은 중심 개념은 언약이며, 신약도 구약의 중심점은 언약이라고 한다. 비록 축복도 중요한 개념임에는 틀림없지만 언약의 내용 속에 축복이 포함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축복'보다는 '언약'이라 함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언약에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언약의 3중 공식이 있다. 그것은 "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이다.
계약에 대한 핵심적 구절들은 아브라함과 관계된 창세기 12:1-3 과 다윗과 관계된 사무엘하 7:11-16(대상 17:10-14) 그리고 새언약과 관계된 예레미아 31:31-34이다. 나아가 창세기 3:15와 9:25-27 등이 포함된다.
창세기 3:15절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에서 '그의(후)' 남성 인칭대명사로 이해해야지 '그것'이나 '그들'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9:25-27중 27에서 주어는 '하나님(엘로힘)'이지 야벳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샘의 장막에 거하신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문맥상, 문법상 올바르다.
창세기 12:1-3 중 3절에서 '니브레쿠'는 니팔(다순재귀형)이다. 이것을 우리는 수동으로 이해하여야 하여서 '아브라함'을 인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모든 족속이 자신들을 축복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매개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약 성경의 중심점은 귀납적 방법에 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나타나는데 '언약'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언약'을 연구함으로 성경 신학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
2) 구약 성경에서의 특별한 주제 3가지를 임의로 선정해서 설명하시오.
구약 성경의 주제들 중 '축복', '언약', '율법' 등 3가지 상호간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볼까 한다.
창조 설화의 주제는 바다와 공중의 피조물과 남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축복'은 홍수 이후에도(창9:1) 계속되었으며, '축복'은 구원의 표징이었다.
창 1-11장과 족장 시대와의 분명한 연결점은 창 12:1-3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섯 번에 걸쳐 '축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창조하고 풍성한 축복을 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이탈되었던 민족을 위해 하나님은 다른 형태의 축복-아브라함 안에서 땅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임 -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족장 설화에 '축복하다'라는 동사는 무려 82회나 나타나며 계속적으로 개념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 축복은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계승되는 것이다. 이렇게 '축복'이 창조 설화에 뿐 아니라 족장 설화에도 계승 나타날 뿐 아니라 창조 설화에서 발견되는 축복의 형태가 족장 설화에도 나타난다. 즉, "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1)"
'축복'과 '언약'의 두 개념이 두 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이다. 언약과 축복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혹자들의 잘못된 견해대로 가나안 사회와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시대의 인물에게 주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또한 자손, 종족, 땅, 모든 민족에 대한 축복, 왕등 그의 언약과 여러 형태의 구원의 표징에 실현되었다.
이제는 언약과 율법의 관계를 알아보자.
언약과 율법의 통일성을 부정할 수 없다.
언약과 율법 관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신학자들의 견해는 족장 자료들은 출애굽시의 자료로부터 소급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 견해를 지지하거나 암시하는 곳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출애굽 자료는 족장 설화 자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 15:7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런 유사한 형식을 보면서 우리는 출 20:2절이 창 15:7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창15:7의 아브라함이 계약을 받을 때의 분위기와 출 19:18절의 시내 산에서 계약이 전수되던 때의 분위기가 같다(창 15:17, 출 19:18, 출 3:6 15:2, 18:4)
하나님께서 출애굽때 하신 일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출2:24등).
땅에 대한 언약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시기로 맹약 하셨던 그때 더욱 확실해졌다(출 6:4 등).
출애굽기의 저자는 족장들에게 전달되었던 과거 축복의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로 보았다. 그 계약은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현대 신학자들이 시내산 계약은 창세기 자료에 계명과 규례와 의무를 부과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폰라드는 출애굽기 기사와 시내산 계약 사건이 서로 다른 자료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 이유를 신명기 26:5-9의 신앙고백 속에 시내산 계약 사건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출애굽과 시내산 계약(출 19:3-8, 20:2-17)과의 명백한 연관성이 있다. 이 두 신앙고백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들은 애굽에서의 해방과 시내산 계약의 요구에 응하도록 하는 호소를 연결하였다. 따라서 시내산 계약은 역사, 출애굽 신학 또는 언약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순종은 계약의 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순종의 의무가 창세기 22:18과 26:5절에 강조되어 있다. 히브리서 11:8절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언약이 하나님의 선물 일뿐 아니라 율법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시편을 통해 알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이점을 찬양했다(시1:2, 19:7-11 등)
언약은 율법과 상치되지 않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언약과 율법의 창시자는 동일한 계약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2) 종교적 율법이나 구원을 얻는 가정적인 수단들이기는커녕 율법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3) 하나님 자신의 성격과 동등한 거룩한 수준의 생활을 요구하는 율법은 또한 죄의 용서와 속죄를 통해서 그 율법 아래 있는 실패에 대비했다.
4) 율법의 전체와 어떤 요구에 대한 문맥도 은혜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위에서 '축복'과 '언약'과 '율법'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상호간에 긴밀함이 있으며 통일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축복과 언약을 분리할 수 없으며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삶(율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언약 백성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율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창15:6)에게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라고 말씀하셨고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언약과 율법간에도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에서 언약과 율법간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들어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단지 율법 고유 영역을 설명하고자 함뿐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언약을 믿음으로서이지 율법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다란 말이다.
3) 제 5 장부터 15장까지를 간단하게 요약하시오.
제 5 장 : 언약의 서론-족장이전 시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말 속에는 창조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되어졌음을 내포하고 있다.
창조 시기는 '태초'로서 하나님 외에 만물의 절대적 시초를 말한다. 창조와 관련된 단어 '바라', '아사', '야사르'가 있는데 이것들을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사야 45:18절에서 다 같이 쓰였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바라)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야사르) 만드셨으며(아사) 견고케 하시되(쿤) 헛되이 창조치(바라)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야사르)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창조의 날들은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절정에 달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귀한 선물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형상이 지식, 의, 거룩함이라고 말한다.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바다와 공중에 있는 만물에게 축복하셨다. 인류에게는 이것들보다 더 부가적인 축복을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한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총독으로서 행해야 할 것이지 인간 제멋 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후 안식하심으로 창조와 그 이후의 일들을 구분하셨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은 언약을 맺어 자손을 약속하셨다(창 3:15). 아브라함 때까지 20명의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그 시대를 위한 축복의 방편으로 뿐 아니라 하와에게 약속한 그 "자손"의 진보를 위한 계획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함으로 죄가 세상에 관영 하였다. 여기서 카이저는 M.G. Kline의 견해를 따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당시 통치자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 계열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봐도 성경 신학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보기에 구태여 당시 통치자들이라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죄의 관영으로 세상은 홍수 심판을 받았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구원을 받았으며 노아가 그의 자녀들에 대한 예언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말씀을 전하셨다.
창세기 9:25-27에서 27절이 가장 핵심적인 말이다.
"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27) " 에서 셈의 장막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사람들은 증식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모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지면에 흩어심으로 심판을 하셨다. 이때 하나님은 다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족장 이전 시대와 족장 시대를 연결하는 창 12:1-3에 있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셈의 후손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이미 말했었는데(창9:27) 그 언약을 계속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해서 (그들의 믿음으로 응답함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족장 이전 신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말씀으로 일관되고 진전된 통합된 발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창조적인 능력의 말씀 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약의 말씀 안에서 끝난다.
죄에 대한 심판의 주제들과 함께 자손(창 3:15), 하나님께서 거하실 민족(창9:27), 그리고 땅 위의 모든 민족에게 주신 좋은 소식의 축복(12:3)에 대한 새로운 말씀이 찾아 왔다.
제 6장 : 언약의 준비들-족장 시대
하나님 계시의 새로운 출발이 창세기 12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족장 시대의 계시의 말씀은 족장 이전 시대의 것에 부가되었다. 족장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귀를 직접 대면한 사람들인 "선지자들"로 취급되고 있다(창 20:7, 시105:15).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직접 나타나시기도 하셨다(창 12:7, 17:1, 18:1 등). 하나님의 현현은 그의 언약의 말씀과 위로와 지시의 중요성과 신빙성을 뒷받침하였다.
"여호와의 사자"(창16:7)가 그들에게 나타났는데 족장들 스스로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 한분만이 받으실 존경과 예배와 영광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구별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바로 성육신 전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이 시기에 하나님은 환상과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는데 환상은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제한되어 나타난 반면 꿈은 다양한 사람 심지어 블레셋 왕 아비멜렉등에도 나타났다.
창세기 12-50장의 바로 처음부터 강조 점은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의 말씀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5회에 걸쳐 언약하셨다.
언약의 내용은 자손, 땅, 모든 민족의 축복 이 세 가지였다. 이 중에서 모든 민족에 대한 축복이 가장 중요시되었으며(이것이 언약의 목적임) 각 족장들이 이를 위해 쓰임 받았다.
창세기 기자는 창12:2-3을 축복과 언약의 말씀의 본질로 제시하였다.
2절에서 강조 점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데 있다(히브리어 동사의 연장형인cohortative를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음).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케 됨은 하나님께서 복주심의 결과이다.
3절에서 '내가 복을 내리고'가 히브리 동사 연장형인 cohortative가 사용되어서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3절 후반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내용에서 니팔완료형(단순재귀형)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몇몇 학자들의 의견과는 달리 수동형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수동으로 해석할 경우 앞의 문맥 즉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 12:2-3은 성경의 최초의 세계적인 선교 본문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상속자
'자손'에 관한 것은 족장 설화의 지배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원복음(창3:15)에서는 한 남성의 인물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족장 시대에는 여기에 약속된 자손의 공동적이며 전형적인 양면이 덧붙여짐으로 인해 계시의 진보가 나타나고 있다. 이 자손의 개념은 미래의 은혜로서의 자손과 현실적이며 영적인 하나님의 현대적 은혜로서의 자손, 이 두 가지 면이 있었다. 자손은 복수가 아닌 집합 단수 명사로 사용되어졌다.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을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기업(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창 15:18절에서는 땅의 경계를 말씀하셨고 17:1-8에서는 그 땅은 '영원한 소유'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질적이거나 현세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의 영적인 면에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주셨다. 이것은 또한 미래에 부여될 완전한 땅에 대한 보증이나 서약이 되었다.
유업
아브라함과 언약의 후손들이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하다. 오렐리(von Orelli)는 그래서 이것을 '언약의 왕좌'라고 표현했다. 축복을 받은 자는 이제 그 자신이 세계적인 영역을 위한 축복에 공헌하는 것이다. 이방이 이 복을 받는 방법은 아브라함과 같이(창15:6) 믿음을 통해서 이다. 믿음의 대상은 전체 언약의 내용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인격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조건 없이 이루어졌다.
보증의 말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족장들에게 계속되어 왔고 실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한편으로 언약은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3부형식중 첫부분을 받았다. 즉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낮추심이 나타난다. 야고 보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었다"고 했다. 그들의 관게는 사랑과 행위의 관계요 아브라함이 행한 모든 일에 나타나는 축복의 관계였다.
언약의 치리자
족장들로부터 주권은 유다에게로 넘어간다(창 49:8). 그의 상징은 당당한 사자와 같을 것이다. 그에게 왕권과 치리 자의 지팡이가 주어진다. "실로가 오기까지"의 의미를 인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실로'란 메시야를 지칭한다고 봐야겠다. 이것이 문맥(창49:10의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과 일치한다. 또 에스겔 21:27의 "권리의 소유자가 오면 그에게 나는 그것을 주겠다"와 일치하는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
언약을 맺어신 하나님께서는 족장 설화에서 여러 가지 명칭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특히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속성이다. 엘샤다이는 족장 설화에서 6번과 욥기에서 30회 가량 나타나는데 뭇 사람들이 샤다이를 '산의 하나님' '양육하는 자'라고 한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는것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부름을 받는 자들과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하여 활동하시며 또 하실 수 있는 위대한 통치자이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신학은 언약한 상속자, 유업, 도는 족장들의 승리에 대한 확실성을 보장하는 말씀, 선택받은 자손에 대한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보증과 결부되었다.
축복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축복의 행위도 중요하다.
축복과 관련해서 족장들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창22 등). 또 하나님은 계속 반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즉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시편 기자는 인간은 무덤을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 즐겼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표현하였다.
제 7 장 언약의 백성: 모세 시대.
족장 시대와 모세 시대간의 간격이 400여년인데 그간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족장들과 맺어신 언약을 이루시고 계셨다. 그것은 출 1:7에 야곱의 자손이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왔다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창1:28과 35:11절에 언약된 축복을 분명히 인유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명칭대로(I am) 그들과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 주셨고 그 백성들으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족장들과 세운 언약을 늘 기억하셨는데(출 2:24), 이것은 그의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를 기초로 한것이었다.
하나님은 '야훼'(출 6:3)로 나타나시고자 했다. 하나님의 명칭과 인격에 대한 논의를 하는 데 출 6:2-8절은 중요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엘샤다이 신분으로서 나타났으나 이제는 야훼의 신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름은 인격, 특성, 속성과 인격의 본질을 계시하였다. 이 명칭은 정적 개념이 아니라 동적이며 활동적인 현존에 대한 약속이었다.
출애굽기의 기자는 족장들과 출애굽 시기를 직접적으로 연결하였다. 그에게는 시내산 계약이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연장이었다. 애굽과 시내를 이전 언약의 중단으로 취급하기보다 그들이 요망하는 바는 반복적인 언약을 준수하시는 그 분의 신적인 성실성을 선언한 새로운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
나의 아들, 나의 장자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말했다(출 4:22-2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보이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였다(신32:6). 이스라엘의 '아들'신분은 관계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의 아들', '나의 장자'도 '자손'의 개념과 같이 장차 올 어떤 한 인물 즉 전체를 대표하는 한 인물과 전체를 함께 나타내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집합 용어이다. 신약 성경 마2:15에서 예수 님에 대하여 '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흐르는 용어, 인칭, 의미의 연속성은 단순한 우연 일치 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지 하나님의 계획의 진행 과정과 유일한 백성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이다.
나의 백성, 나의 소유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신실 성은 재앙과 출애굽과 광야 여행에서 증명되었다. '나의 백성'이라는 명칭으로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반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백성'이라고 해서 부당하게 이스라엘을 편애하면서 애굽에게 재앙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가 내린 재앙들은 애굽인들에게 복음 적인 호소를 한 것이라고 본문은 주장하였다. 갖가지 재앙은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 8:22),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출9:14, 8:10) 등. 또 사실 애굽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있다.(출9: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유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셨던 신실한 사랑(hesed)에 근거하였다. 유월절 식사 준비시 '회중'이라 불리었으나 유월절과 출애굽이라는 두 큰일 이후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소유'는 움직일 수 있는 재산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나타내는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출 6:7)라는 귀절이다.
왕같은 제사장들
출 19:3-6에서 중재자의 역할이 선언되었다. 이스라엘의 존재는 온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왕은 세상과의 중재자가 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세 번째 면모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지도 아래 대표적 입장을 취하려 하여 오히려 국가적인 제사장직의 특권을 사절하였다(출19:16-25).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초의 목적은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이 다시 선언되기까지 지연되었다.
거룩한 백성
출 19:6에서 또 다른 명칭이 이스라엘에게 부여되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그의 백성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시내산 계약(율법)이 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면'이라는 것은(출 19:5, 레26:3, 신5:33) 문맥상 지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독특한 지위,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중재 적인 역할과 신분에 대한 조건이지 언약의 조건은 아니다. 즉, 그것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성결과 성직의 경험을 제한하고 곤란하게 하거나 무효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스라엘의 선택, 구원 또는 옛 언약의 현재나 미래의 계승에는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생존하고 모든 일이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삶과 모든 일이 잘됨을 경험하게 된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을 청중하고 그의 계약을 지켜야 했다. 언약의 은혜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삶이 이제는 새로운 율법의 순종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았다.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요, 백성이라고 불렸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은 여호와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신 16:20과 에스겔 20:11을 참조할 경우 이점은 더욱 명백해 진다.
하나님의 율법
이 시대에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이 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민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덕적 판단의 표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확고하고 흠 없는 거룩한 인격에 고정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덕법을 따를 의무가 주어졌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의식 법은 율법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을 향해 마련하신 희생 제도였다. 범죄 한 인간은 이 방법을 통해 정결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죄는 이것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자고죄(민 15: 27-36)는 신약에서 성령훼방죄로서 용서받을 수 없다. 희생 제도에 사용된 희생 제물로는 사실상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단지 이것들은 실제적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에 불과했다. 민법은 당시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마련한 것으로서 도덕법을 적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막
출 29:43-46에서 하나님이 그의 장막에 거하심을 말하고 있다. 이제 3 화음적 구조가 완전하게 되었다. 언약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반복된 공식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나는 너의(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니
내가 너희(그들) 중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거주에 대해서는 히브리어에 두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하나는 '야삽'이고 다른 하나는 '사칸'이었다. '야삽'은 영원한 거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천국에 계신 하나님을 이야기 할 때 사용되며 '사칸'은 일시적 거주를 의미한다. 장막에 사용된 거주는 '사칸'이었다.
모세 시대에는 여호와의 거룩한 임재가 중심이며 중요하였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데 네 가지 형태가 사용된다. 여호와의 '얼굴, 용모, 면전', '영광', '여호와의 사자' 그리고 그의 '이름'이다. 이 하나님 현존의 주제들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진 장은 출애굽기 33장이다.
당시 신학은 구속, 도독성, 예배라는 세 가지의 지배적인 개념들을 주축으로 하였다.
제 8 장 언약의 장소: 왕국 이전 시대.
신명 기는 초기 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의 서론 역할을 하였다.
신명기에서 열왕기하까지는 모세로부터 포로 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쓰기 위해 시도하였던, 그리고 그것을 신학이라는 유리한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던 초기의 저작이다. 신명기와 초기 예언서와 언어문체면에서 유사점이 많다고 모세 바인펠트는 말했다. 또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의 관계도 매우 밀접한데 이 사실은 신학적으로 주요한 목적 다섯 가지가 신명기와 여호수아에 함께 나타나 있다.
신명기와 초기 예언서들과의 관계의 밀접 성은 위에서 말한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약에 관한 것이다(아브라함 언약-시내산 언약-다윗언약). 다윗과 그 후계자들은 항상 시내산 언약을 염두 해 두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언약(족장 전승)과 모세 언약(모세 전승)을 가장 강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시거나 이미 선택하셨던 '장소'이다.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안식과 기업의 주제가 '장소'의 개념과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이 두 가지 강조 점은 왕국 이전 시대의 지배적인 두 가지 신학 주제로 등장한다.
출애굽에서 포로기에 이르는 역사와 신학을 지배하였던 세 가지 요목적인 진술들은 신명기 31장, 여호수아 23장, 삼하 7장이다. 이외에 다른 여섯 귀절도(수1:11-15, 삼상12장, 왕상 8:14-16, 수12장, 삿 2:11-23, 왕하 17:7-23)도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런 것들은 초기 예언자들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상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반면 출애굽기에서 포로 기까지 이르는 신학의 전체적인 발전을 형성할 수는 없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불렀던 맹세의 노래 주제는 과거에 선언되었던 언약의 성취(땅, 안식, 장소)에 집중하였다.
그 땅의 상속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있었던 절박한 가나안 정복을 하나님의 언약에 관련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똑같이 "여호와의 기업"으로 불리었고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이 되었고 가나안은 언약의 땅이 되었다.
땅은 신명기에서 여호와의 선물로 불리었고 이 선물은 조상들에게 언약하였던 바로 그 땅이었다.
폰라드는 잘못 생각하여 신명기에서의 '땅'과 조상들의 언약과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 땅은 여호와의 것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줄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레위기 25:23절에서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함으로서 토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는 동안 그들이 경작하고 살기에 적합한 땅을 여호와로부터 항상 받았다.
폰라드는 잘못 생각하여 '토지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땅은 선물이었으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소유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책임은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 보충적인 개념이었다. 이 땅에서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이었으나 특별한 강조는 땅의 축복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왕국 이전 시대의 신학과 더불어 초기 시대의 신학을 결합시키는 접속 개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 땅에서의 안식
민수기의 마지막 부분과 다윗 시대 사이의 핵심적인 연결점을 제공해 주는 것은 언약의 주제의 바로 이면(안식)이었다. 모세가 처음으로 '안식'을 약속 받았다. 이 안식의 의미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장소, 주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평화와 안식 또는 미래에 있을 슬픔과 수고의 종식들을 나타내었다. '안식'은 지형 학적으로 장소, 물질적인 것과도 강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괴로움을 당하지 않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장소"란 의미도 있다.
나아가 이 안식처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며 머무시는 곳이기도 하다. '믿음'을 가진 자만 이 안식에 들으갈수 있다.
성취에 대한 구약 성경의 관점에서만 '안식'의 영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땅의 선택된 장소
벨하우젠은 신명기 12:5, 14의 말씀을 근거로 예배의 중앙 집중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소(The place)'가 지역적인 의미에서 '그'가 아닌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곳은 어디든지 예배가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신 12:14을 "너의 지파들 중 어떤 지파에서 여호와께서 택하실 모든 장소에서"라고 번역해야 한다. 장소는 등급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의 장소(locality)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은 에발산 위에 제단을 세우라는 명령을 담은 신 27:1-8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그들이 신명기가 무효화시킨다고 생각되고 있는 출애굽기 20:24의 바로 그 말씀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땅에 거하는 이름
신명기, 열왕기서 등에 '이름을 두시려고'가 나타나는데 폰라드는 여기서의 '이름'을 하나님의 존재, 본성, 인격을 나타낸다고 했으나 보스는 이에 반대하면서 '소유권 주장'과 관계된 것이라고 바르게 말했다. '이름을 두셨다'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소유하셨다는 의미이다.
그 땅의 정복
땅의 정복에 관한 규례가 신명기서에 나타나며 아울러 여호수아서에 예시되어 있다. 이 싸움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적들의 마음에 공포와 겁을 하나님은 집어 넣어 셨다. 이 정복 전쟁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잔인하신 분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이다. 왜냐하면 정복 전쟁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 할 때까지"(창 15:16)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600년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이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그 땅에서의 예언적 역사
신명기는 여호수아서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사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카알 그레셔는 사사기의 구, 개념, 그리고 신학적인 강조 점들이 신명기의 그것들과 같다고 했다.
사사기를 통해 실패의 모습만 보아서는 안되고 이미 신명기 30:1-10에서 말한 '돌이키다'는 것과 연관된 면을 살펴야 된다. 즉 회개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계속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가 쁹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축복, 언약, 보증을 받았던 것이다.
구약 성경 내에서도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들을 우리는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은 선하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21:45) 후에 이사야는 이 선한 말씀을 '다윗의 확실한 은혜'라고 불렀다.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자손에 대하여 여자의 '후손', 셈의 종족, 아브라함의 '자손', 유다지파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으로 묘사되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라고 했다. 모세는 다른 여느 선지자와 비교될 수 없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였기 때문이다. 장차 올 이 선지자는 '형제 중의'한 이스라엘 인, 모세와 같은 자,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자 였으며 신약에서는(베드로와 스데반은) 예수님에게 적용하였다.
요약
이 시대 신학의 핵심은 땅의 기업과 안식이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곳이었다. 또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선한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들은 선하게 여겨질 수 있었다. 사람들의 불 신실함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다윗의 집안에 계속되었다.
제 9 장 언약의 왕: 다윗 시대.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결속시킨다. 이 언약은 또 초기 예언가들의 활동에 근거를 두지만 확장되고 분리된 내용의 성격을 띤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연구할 때 연구 범위에 들어가야 할 부분들은 계승 설화(삼상 16-31장과 삼하 1-24장 그리고 왕상 1-2), 제왕시 (시 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1-11), 언약 궤의 역사(삼상 4:1-7:2)와 다윗이 언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을 때(삼하6장) 등이다.
언약의 왕
(신17:14-1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러므로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지 않는다. 단지 시기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기전(언약과 관련된) 두명의 왕이 있었는데 하나는 기데온의 아들 아비멜렉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불순종으로 인해 버림받은 사울 이었다. 신 17:14-20절의 사울의 반대는 '왕' 제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정신과 동기에 대한 저주였다.
사울이 배척 당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을 찾으셨다(삼상13:14). 그런 후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세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왕이 된다. 예배에 사용되었던 기름은 '성령'을 상징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구약 성경에 39회 사용 되었는데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에 대하여 23회 사용되었다.
이 사실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장차 올 어떤 인물, 보편적으로 다윗의 계통에서 날 어떤 인물을 암시하는 남은 9귀절이 있음을 뜻한다. 그는 지상 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통치할 여호와의 왕이었다. 이것은 바로 왕이신 메시야를 묘사하는 용어이다.
언약의 왕조
다윗에게 부어 주신 축복의 말씀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다음에 위치하여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해서 삼하7장이 중요하다.
집
집(바이트)은 거주지 이상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서 '집'이 사용된 예를 보면 그것은 부모, 자녀, 친척, 한 가족을 의미함을 알 수 있고 또 왕조의 후손이란 의미까지 포함한다. 삼하 7장에서 '집'은 여호와께서 영구히 다윗에게 주실 자손의 혈통이었다. 다윗의 '왕조'와 권좌와 나라는 영원히 보존될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에 의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자손
다윗의 '자손'은 솔로몬 개인을 의미하며 성전을 건축할 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영원히 계속할 집은 다윗 왕좌에 오를 후손을 이야기한다.
나라
다윗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는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다윗의 왕좌와 나라는 후에 여호와 자신의 것으로 불리었다.
나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은 제왕 시 와 종말론 시 또는 대관식 시에서 얻을 수 있다. 현재 다윗은 그 나라는 영원하리라는 말씀을 삼하 7장에서 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이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언이 있다. 여기서 아비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된 명칭이다. 하나님의 아들 신분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류의 헌장
다윗 언약의 주제들은 이전의 축복들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축복은 다윗의 축복으로 계속되었다.
(삼하7: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영구히 이를 일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주 여호와여 인간의 규례대로 하셨나이다
여기서 규례라고 번역된 것은 원어로 '토라'인데 구약 성경에서 220개 예들 중에서 17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의 율법'은 '이것은 인류를 위한 헌장'이라는 의미이다.
이 귀절에서 분명한 것은 영원한 왕조, 통치권, 나라를 부여받았다는 인식과 더불어 다윗은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발하였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이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헌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옛 계획은 존속 되어 와서 지금은 한 왕과 한 나라를 포함하였다. 또한 그와 같은 축복은 모든 인류의 미래를 포함하였다.
언약의 나라
다윗의 나라는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윗도 이 언약의 영원성에 대해 믿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조건적이지만(조건대로 살지 않으면 무효화된다) 직계 후손에게 언약을 전달하는 일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언약 궤와 나라
언약 궤보다 여호와의 임재와 권능과 더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없었다. 언약 궤는 극히 중요하며 언약 궤의 노래는 언약 궤가 있는 위치와 여호와의 임재를 동일시하였다. 언약 궤가 있는 곳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은 기계적이 아닌 보증으로서의 역할을 의미한다.
언약 궤와 다윗의 나라는 시편 132편의 주제이며 이 시편은 다윗에게 하신 "맹세"와 언약 궤에 대한 노래를 기념하고 있다.
제왕 시와 나라
제왕 시들은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에게 제시된 언약과 맹세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시편 2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온 세상을 통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오늘날'은 바울에 의해서 '부활의 날'로 규정되었다.
시편 18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열국 앞에서 찬양을 받으며 언약은 영원히 지켜진다.
시편 20편 21편은 간구와 응답으로 쌍을 이루고 있다. 시편 20편의 승리에 대한 기도는 시편 21편에 많은 축복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응답되었다. 대적이 완전히 훼파 되었으므로 사건들의 전모는 어떤 왕의 권능도 능가하였고 다시 한번 메시야를 칭송하였다.
다윗 가문을 시편 45:6에서 엘로힘으로 묘사하였다. 이스라엘 재판장도 하나님의 대표였기에 엘로힘으로 불려 졌던 것이다.
다윗이 시편 89:26-27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의 '장자' 그리고 '높은 자'로 묘사된 것처럼, 그의 왕좌도 환유법에 의해 시편 45편에서 엘로힘으로 불리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땅 위의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과 보증으로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상징하는 것으로 지정되었다.
시편 72편은 다윗 왕국의 의, 축복, 영원성 그리고 세계적인 범위를 강조하고 있다.
사무엘하 23:1-7의 자극을 받아 시편 72:6-7은 의의 왕을 태양과 그의 백성들에게 내리는 비로 묘사하였다.
시편 89편은 삼하7장에 대한 가장 세밀한 주석이다.
시편 101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통치자를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시편 110편에서 메시야의 제사장직과 왕권을 결합하였다.
시편 132편은 언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것과 다윗에게 그의 나라에 대해 맹세한 언약을 결합하였다.
시편 132:8-10은 솔로몬 시대에 언약 궤가 긴 여행을 마쳤던 사실을 보여 준다.
시편 144편은 본질적으로 시편 18편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의 모형을 회상 하였을 때 다윗은 장차 올 새 시대의 "새 노래"를 불렀다. 왕은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왕이 잘되고 잘못되고에 따라 백성들의 행복이 좌우되었다. 그의 왕국은 끝이 없을 것이며 그의 통치는 의로우며 바르고 모든 완전함으로 충만할 것이다.
계승 설화와 나라
솔로몬의 계승 설화를 두고 많은 비평 학자들이 비평을 가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비극(다윗의 범죄, 삼하 11:27)과 실패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목적과 언약은 여전히 진행되었다.
제 10 장 언약의 삶: 지혜 시대.
지혜 시편을 구별하는 기준은 문학 형식과 주제이다. 문학 형식과 주제를 통해 지혜 시편을 구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40년간 지혜 문학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스라엘의 지혜 문서들을 주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 문서들과의 관계를 취급해 왔다.
지혜 문학 연구에 있어서 핵심 되는 문제는 어떤 신학적인 제목이나 특수 용어가 지혜와 함께 언약과 율법을 전달하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개념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에 대한 경외
여호와에 대한 경외가 족장들의 언약을 율법과 지혜와 함께 연결하였다.
아브라함, 요셉, 욥 등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 또 모세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
이 경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응답하는 결과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며 친근히 하며 그를 섬기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일부 애굽 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신앙으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었다. 누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잠언 1:7은 잠언 전체의 모토이며, 전도서 12:13-14는 전도서 전체의 요약 및 결론이다.
여호와에 대한 경외는 지혜 문학에서 지배적인 개념이며 신학적인 원리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하나님 경외는 창조된 세계를 이해하고 즐기는 데 들어가는 열쇠이다.
여호와 안에서의 삶
여호와에 대한 경외와 삶 사이의 관계가 잠언 본문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잠 10:27, 14:27, 19:23, 22:4). 언약과 시내 산의 관계에 대한 문제 해결은 언약과 지혜의 관계를 해결함으로써 가능하다. 언약과 시내 산의 관계에 대한 문제 해결은 언약과 지혜의 관계를 해결함으로써 가능하다. 신뢰와 순종의 결과나 열매는 한 마디 말, "생명"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정의를 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여호와 안에서의 삶과 진리의 통합
속과 성, 모든 진리의 통일성에 대하여 제시된 최상의 사례는 전도서에서 발견된다.
전도서 3:11은 핵심 구절 중하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을 때에만 인간은 진리와 교훈과 삶의 통일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진리와 사실과 이해를 통합하는 논제를 소개하는 것은 우주를 창조하신 한 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진리의 통일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지혜와 율법 모두는 언약 안에서 신앙 인의 올바른 응답을 반영하였다.
여호와로 말미암는 지혜
지혜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잠언에서 여호와 경외와 지혜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섯 귀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잠언 8장이 그 핵심이다. 또 잠언 8장에서 13절이 중심된 내용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언 8장에 지혜의 시간적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고, 이 지혜는 창조 시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였다. 사실 지혜는 여호와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수단 중의 하나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모세의 신학의 표준과 규범이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의 속성도 "여호와에 대한 경외"로서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위한 규범을 제공하였다.
행복주의와 여호와
지혜 격언들은 물질적인 데 근간을 가진 실용주의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만물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를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근면과 순종 그리고 정직한 노동은 보상을 받았다. 그 모든 것 하나 하나는 자체의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목표나 동기가 축복과 보상 자체에서 발견되지는 않았다.
잠언 16:1에 의하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에게 있느니라". 그러나 그 목적이나 섭리는 인간이 쉽게 알 수 없다(예, 욥).
전도자는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모든것 가운데서 낙을 즐기는 소위 인생의 세속적인 면들조차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거나 세속적인 존재의 가치를 찾는 인간 내부의 선천적 선함은 아무것도 없었다. 행복하고 복을 누리고,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아내와 즐겁게 지내는 능력은 신의 섭리로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선물이었다.
솔로몬의 아가서는 전체가 이 주제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아가서의 목적은 아가서 8:6-7에 설명되어 있다. 사랑은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화염"과 같다. 사랑은 소멸될 수 없으며, 바꿀 수도 없으며, 부와 지위, 명예와 같은 다른 좋은 것에 의해 유혹 받을 수도 없다. 솔로몬의 아가서는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에 대한 주석이다.
인간이 숨을 쉬고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 있는 행위일지라도 사물에 대하여 언약된 신적 섭리를 신뢰하는 상황, 즉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언약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시가서와 시편 일부의 주제이다. 따라서 시가서도 언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제 11 장 언약의 날: 9 세기
예언의, 심판의 말씀들 속에 초기의 언약에서 선포된 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대한 밝은 전망이 이 심판의 말씀들과 결부되어 나타났다. 여기에 순수한 언약의 교리가 있다. 그래서 예언서와 앞의 성경들 간에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성취된 모든 언약은 성취된 예언이다. 그러나 단순한 예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예언자들의 예언은 미래가 그들의 하나님과 그의 의의 통치에 속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 시대 사람들의 거룩한 삶을 위한 자극제로 주어졌다.
문서 예언서에서 소위 메시야 적인 대목은 주로, 최초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또는 다윗에게 제시된 언약의 반복이며 설교적인 응용이며 확충이었다. 따라서 이 예언들은 접속되지 않거나 흩어진 것들이 아니라 언약 교리의 공통적인 줄기에서 난 새싹이었다.
하나님 언약의 범위와 성취에 있어서는 영원하며 단일한 계획이었다. 범위 상으로 그것은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 하나의 계획 안에서 믿음으로 결합된 민족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이며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9세기의 언약
범죄 한 국가에 대한 심판 이후에는 새로운 날, 새로운 종, 새 계약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승리가 따르게 되었다.
엘리야는 반역하는 백성에 대한 신적 사법권을 나타내었고, 엘리사는 백성들이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는 자로 나타난다.
9세기 예언서로 오바댜서와 요엘서를 들 수 있다.
에돔과 언약: 오바댜
오바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날"이다. 이 말은 예언 문서에서 가장 처음 나타나는데 '여호와의 날'에 에돔은 이방인 민족들과 같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시온산의 "피한 자들의 무리", 즉 남은 자가 있다. 심판의 날에 이들의 지경은 족장들에게 언약한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은 통치시 사용하는 방법은 '재판'과 '통치'의 직위를 수행할 인간의 "구원자들"을 통한 것이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이 그들의 중심이 되며 "나라는 여호와께 속할 것이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통틀어 계속되었으며 가까운 장래의 완전한 성취를 위한 증거로서 특별한 심판으로 매순간 나타났다.
여호와의 날:요엘
요엘 예언의 경우는 여호와의 위대한 날과 두려운 날의 전조인 극심한 가뭄에 뒤따른 무서운 메뚜기 재앙이었다. 이미 때는 늦었어도 아직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하여 마음을 찢고 애통하며 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요엘 서에서 여호와의 날에 있을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땅의 축복과 모든 육체 위에 하나님의 신을 장래에 부어 주실 언약이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일 뿐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구원하시는 날이며, 그 날이 도래함을 알리는 우주적인 징조를 수반한다. 이 날에는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신을 부어 주신다.
요엘서에서의 종말론적 시간은 기독교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재림 시기까지 확장되는데 이것은 신약 성경과 일치한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교리는 "내가 보응 할 날에는", "내 사자가", "그들의 죄를 보응 하리라"등의 말로 모세 오경에도 이미 나타난다. 이것을 통해서도 예언서가 성경의 앞 부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 12 장 언약의 종: 8 세기
B.C 8세기 예언자로는 아모스, 호세아, 요나, 미가 그리고 이사야가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 세계의 하나님에 대한 의의 결핍에 대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으라는 권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희망의 필요성 등을 전했다. 그리고 아모스는 하나님을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는 통치자로 보았다. 모든 민족들은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따라야 했다. 그 표준대로 생활하지 못했던 각 민족은 그들 자신의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저주 아래 있었다. 이 역사의 여호와는 창조의 특권을 가지신 주권자였다. 그는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었다. 아모스서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서와 같이 그들의 응답의 여부에 심판과 축복이 달려 있는 양자택일의 전망에 관한 경고를 받았다(아모서서가 모세 오경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일으키실 것을 언약하셨다. 다윗의 나라는 해를 받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파멸의 상황에서 그 나라를 회복하실 터인데, 그것은 그가 다윗에게 그의 집이 영원할 것을 언약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모스서에서의 '그날'은 다윗언약(삼하7:11-12)과 관련되어 있다. 아모스는 인간의 규례로서 삼하 7장의 다윗 언약에 대한 해석을 반복하였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의 멧세지를 그의 말에서 뿐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도 간직하였다. 호세아서도 아모서와 같이 모세 오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뿌리어져", "나의 백성",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등의 어휘가 모세의 계시를 회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호세아를 통해 모세의 계시는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그의 아들을 보호하는 아버지로, 이스라엘을 치료하는 의사로, 그리고 목자로 제시하고 있다. 호세아서에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적 사랑(헤세드)를 지키려 하셨다(신7:9,12 등).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지식, 인애의 부재, 진리의 결핍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런 것들은 다 언약과 관련이 되어 있다.
요나서 신학의 주제는 이방인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확장이었다. 이것은 창 12:3의 또 다른 하나의 확대이다. 이 책에 담긴 많은 교훈은 이미 출애굽기 34:6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에 집중되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신 전혀 새로운 계획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멜기세덱, 애굽에서 나온 군중들, 이드로, 라합, 룻 그리고 그러한 많은 사례의 경우에서 오랜 기간 동안 그의 계획을 진행해 오셨다. 그래서 요나서 역시 모세 오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미가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 미가서 2:12-13은 고대 언약이 남긴 밝은 희망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와 관련된다. 미가의 희망의 중심 사상은 4-5장에 기록되었다. 미가는 예루살렘을 보증하였고, 시온은 모든 민족에 대해 승리할 것이고 고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베들레헴의 작은 고을에서 출생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 사건들은 '말일에' 일어 날것인데 이 날은 여호와의 날의 부분이었다. 미가는 여호와께서 시온산에서 그들을 통치하실 때 '남은 자'를 모으시리라는 언약을 하였다. 베들레헴에서 날 새 통치자의 통치 영역은 전 세계이다. 미가는 미래에 대하여 확신에 찬 기대와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로 그의 메시지를 마무리하였다. 미가는 또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유하심과 인애를 노래하였는데 그들의 조상 야곱과 아브라함에게 안약 하셨던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사야서는 1-39장까지는 주로 심판을, 40-66장까지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사야서 둘째 부분은 그 자체가 참된 구약 성경 신학이다. 이사야서의 27개 장은 신약 성경 27권의 범위와 같은 범위이다.
이사야서의 첫 부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의 싹', '임마누엘', '역사의 주', '모퉁이 돌' 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메시야 사상과 관련이 있다.
이사야의 둘째 편인 40-66은 40-48장, 49-57장, 58-66장으로 다시 3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40-48장에서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에서 구속할, 동방에서 장차 올 영웅 즉 "고레스"이다.
만유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반복해서 나타나며 여호와의 절대성이 나타난다. 창조주, 친족 구속자(Kinsman-Redeemer), 역사의 주, 만유의 왕, 미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은 나타난다.
49-57장에서 중심 되는 특징은 '여호와의 종'인데 그는 인격적인 면에서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 예언자와 예언적인 성직 수임과 그의 역할에서는 메시야 직을 종으로써 함께 가졌다.
두 가지 단어 즉 '종'과 '구원'으로 이 부분 신학을 나타낼 수 있다. 종은 집합명사 일뿐 아니라 전체 집단을 대표하는 자이다. 이것은 20여회 나타난 '종'이란 어휘 종의 노래(사 42:1-7, 49:1-6, 50:4-9, 52:13-53:12)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종'이란 개념은 '자손'개념과 관련이 있으며 족장 시대와 연결 시켜 준다. 이러한 관계는 "영원한 언약" 안에서 "다윗을 향한 신실한 사랑"안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여호와의 종은 다윗 혈통의 메시야적 인물이었으며 장차 올 자손, 거룩한 자, 줄기 등으로 알려진 마지막 새 다윗이다. 둘째 편의 마지막도 '종'에 의한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종의 고난의 결과는 '자손'이 '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58-66장은 자연, 민족, 인간 구원의 새 날의 여명을 선언한다. 이 편의 중심에는 새로운 삶의 원리가 있다. 예언자적, 제사장적, 왕적인 직위의 권능과 위엄을 가진 충만한 메시야였다.
모든 역사의 종국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성령의 무한한 긴 시대를 언급하고 있으며 '새로운 일'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안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새로운'이라는 말은 장차 도래할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하는 의인들이 살 세계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한번 자연 안에서 성취될 평화의 낙원에 대한 이사야의 환상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사야서에서의 신학과 어휘들을 연구 결과 이사야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종'에 관련된 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제 13 장 언약의 갱신: 7 세기
7세기 선지자로는 나훔, 스바냐, 하바국, 예레미야인데 이들은 임박한 심판을 주제로 삼았다.
나훔의 예언은 요나의 예언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였는데, 요나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낸 것에 나훔은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렸다. 나훔 3:1-8은 모든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인 진노를 드러내었다.앗수르의 죄 세 가지는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 니느웨의 피의 범죄 행위, 매춘 행위였다.심판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축복이나 언약의 말씀 또한 나훔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며" 또한 그는 "환난 날에 그들의 산성"이시다. 니느웨에 대한 멸망의 소식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소식'으로서 '야곱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키는 여호와의 사역과 함께 두고 있다.
스바냐는 심판이 세계적인 것과 그 열매들 중 하나로서 열 국의 회개를 예고하는 의지 때문이었다. 또 '겸손한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징계를 받아들인 자들'등의 언어로 지혜 문학과 관련시켰다. 이런 것들은 바로 언약 백성들의 삶의 모습임을 염두 해야 한다.
하박국은 은혜에 동참하는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믿음을 요구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도덕적인 영역에서 "일상생활 또는 상행위에서 '도덕적 견실성' 또는 '신뢰'를 의미하였다. 하나님의 편에서 사용될 때는 그의 말씀에 대한 신실성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하바국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히 믿는 것이었다. 하바국에도 시내 산의 언어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구원은 '악한 자의 머리'를 밟으실 메시야의 구원을 포함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의 선지자였다. 예레미야서의 각 부분은 구약 성경 신학에 자체의 특징적인 공헌을 남겼다.
예레미야는 외적인 종교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렘 3:16-17에서 중요한 메세지를 남겼다.
여호와의 보좌, 예루살렘
"그때에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 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팍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라(렘 3:17)".
여호와 우리의 의
이사야 4:2에서 이미 선언된 '여호와의 싹'은 예레미야 23:5-7과 33:14-22에 예견된 동일한 다윗 족속이다. 렘 33:14-22에서 중요한 것은 '가지'의 활동이다. 이것은 몇 가지 고대 언약들과 관계된다. 1) 계절의 영구성에 대한 노아의 언약 2) 셀 수 없는 자손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약. 3) 제사장 직의 영구성에 대한 비느하스의 언약 4) 그의 자손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다윗 언약 등이다.
새언약
구약 성경 신학과 예레미야의 멧세지의 심장부는 렘 31:31-34의 새 언약에 관한 교훈이다. 이것은 신구약 사이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문제에 관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섯 구절 중 다섯 번째 것이다. 새 언약이라는 명칭은 구약 성경에서 이곳이 유일하지만 그 내용은 '영원한 언약', '새 마음', '새 영', '평화의 언약', '나의 언약' 등으로 나타난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대조가 나타나는데 백성들이 옛 언약을 파괴하였다고 말한다.
새 언약에서 발견된 연속성의 항목들은 다음과 같다. 1) 동일한 언약 창시자 하나님, '나의 언약' 2) 동일한 율법, 나의 율법(시내 산의 것과 같다) 3) 언약의 3부형 식에서와 동일한 하나님의 친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4) 동일한 '자손',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5) 동일한 용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할 것이라.
새 언약의 새로운 면모는(불 연속성) 1)하나님에 관한 보편적 지식 2) 자연의 세계적인 평화와 군사 무기의 부재 3) 세계적인 물질 번영 4) 이스라엘 가운데 지성소의 영속 5) 하나님의 성령을 세계적으로 소유이다.
새 언약을 받는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으로부터 은총을 입을 '자손'이 모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한다.
새 언약은 메시야 시대의 부분이었다. 새 언약 속에 포함된 아브라함, 다윗 언약과의 특별한 연쇄 관계로 인하여 그 당시 그리고 미래에 이방인들의 참여를 말하는 것은 타당하였다.
제 14 장 언약의 왕국: 포로 기의 예언자들
이 시대에는 에스겔과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을 전했었다.
유다 멸망 10년전 잡혀가던 에스겔은 경고의 메세지를 발하였다. 그후 희망과 예언의 신탁의 말씀이 겔 33-48장에 나타난다. 옛 다윗 섭리를 목표로 삼아 가야 할 곳은 오직 한곳이었다. 새 다윗, 그의 왕좌, 그의 나라였다. 희망을 상실한 백성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것이 두 예언서의 초점이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여호와께서 거역 하실 것이라고 했다(겔 16:60).
에스겔서의 모든 장면과 말씀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의 예언자, 그의 언약, 남은 자 그리고 장차 도래할 그의 나라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느 날 백성들을 흩어진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본토로 인도하시리라는 사실이었다. 남은 자들이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고대의 언약들을 계승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열방들을 굴복시키고 승리하실 것이다. 사실 열방은 그 나라의 보호 하에 거쳐 할 것이다.
언약 교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하나의 마지막 단계의 부분이 겔 21:26-27의 첫 단락에서 발견된다. 에스겔은 비극에 처한 유다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유다에게 제시된 메시야적 언약으로 되돌아갔다. 그 분이 나타나실 때 왕관과 제사장의 관이 이 새로운 마지막 왕-제사장이신 메시야에게 드려질 것이다.
겔 34:11-31은 요한복음 10장과 관련이 있으며 내용은 '선한 목자'에 관한 것이다. 에스겔도 예레미야처럼 새 다윗에 관해 말했는데(34:23-24) 이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윗의 씨로 알려진 전체 집단을 다스리도록 언약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삼부 공식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는 새로운 정결과 중생, 이스라엘의 복구와 재 결속에 대하여 나온다.
다니엘서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나라들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고 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때에',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었던 고통의 때'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의 영원한 나라를 주실 것이다. 나라와 왕좌와 통치권으로 언약된 언약의 완성은 결실 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육체적 부활로 믿는 자들을 생명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야는 새로운 의와 영원한 통치권을 땅의 티끌에서 육체로 부활할 많은 그의 '성도'들에게 주실 것이며 그들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제 15 장 언약의 승리: 포로 후기의 예언자들
이 시기의 예언자들로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다.
학개를 통해 중단되었던 제 2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장막과 3부공식(출 29:45-46)과 관련하여 제시된 고대의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거주하셨다는 증거는 그가 그의 영을 백성들 사이에 머물게 하셨다는 사실에서 보여진다. 새 다윗 족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과거의 언약을 계속 성취시켜나갔다는 하나님의 표가 될 것이다.
스가랴는 과거의 언약과 시온의 미래의 보장에 대해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답변인 영감을 받았다. 3:8과 6:12의 '순'이나 '싹'은 마지막 다윗 족속에 대한 고유의 이름이다. 이 순은 '종'과 일치하는데 이 종은 자신의 생명을 사람들의 속죄 물로 주어서 그들의 죄를 제할 것이라고 이사야가 선언한 것처럼 이 스가랴 3:9절은 메시야가 '어느 날'인가에 이 일을 행할 것을 언약하였다. 종-순이 메시야의 처음 강림을 나타냈다면 다니엘의 '돌'은 메시야의 두 번째 강림을 나타내었다. 스가랴서에 나타난 '순'은 제사장이며, 평화의 왕이며, 겸손과 의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는 선한 목자로서 처음에는 환영을 받지만 나중에는 배척 당하여 은 삼십 냥에 팔렸다(슥 11:7-14). 오래 전에 언약하였던 것을 완성하기 위해 돌아온 창조주이자, 구속 주이며, 새로운 지배하실 왕으로서 그것은 지상 최대의 시간이었다.
말라기는 언약의 사자가 그의 성전에 임하게 되는데 그는 언약된 메시야 외에 어느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이 바로 메시야이며 그의 오시는 날은 예언자들이 자주 언급했던 여호와의 날이 될 것이다. 말라기는 그의 성전에 장차 오실 메시야, '언약의 사자'가 인격적으로 거주하는 사실을 목격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은 "위대"하여 이방 민족 중에 높이 들릴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하나님께 속한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언약의 백성, 언약 안에서의 삶, 언약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4) 언약에 대하여 논술하시오.(3페이지 이상)
구약 성경에서의 통일성, 즉 중심점은 언약이다.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 교훈의 초점을 언약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반면, 구약 성경은 그것을 언약, 맹세, 축복, 안식 그리고 자손이라는 단어들을 가지고 표현했다. 구약의 핵심적 초점은 언약의 3부 공식 즉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며, 나는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언약에 대한 핵심적인 구절들은 창 3:15, 창 9:25-27, 창 12:1-3, 출 19-20, 삼하 7:11-16, 렘 31:31-34 등이다.
창세기 3:15절은 인간이 범죄 한 뒤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 때 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9:25-27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 창세기 12:1-3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출애굽기 19-20장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맺으신 언약, 사무엘하 7:11-16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 예레미야 31:31-34은 새언약이다.
언약에 대한 핵심 구절들 뿐 아니라 전체 구약 성경이 이 언약에 관련되어 있다. 이 사실을 보여줌으로 구약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 신학이 추구하는 바이다.
그래서 W.C.Kaiser는 구약 성경 전체를 언약과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족장 이전 시대를 언약에 관한 서론, 족장 시대를 언약의 조항, 모세 시대를 언약의 백성, 왕국 이전 시대를 언약의 장소, 다윗 시대를 언약의 왕, 지혜 시대를 언약 안에서의 삶, 9세기(요나 서와 오바댜서)를 언약의 날, 8세기(요나서, 이사야서, 아모스서, 호세아서, 미가서)를 언약의 종, 7세기(나훔, 스바냐, 예레미야서, 하바국서)를 언약의 갱신, 포로 기의 예언자들(에스겔서, 다니엘서)을 언약의 왕국, 포로 후기의 예언자들(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을 언약의 승리로 개관한 것이다.
언약의 핵심 구절들을 한번 살펴보자.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밑줄친 부분에서 '그'는 히브리어 남성 단수 독립 인칭 대명사이다. 이 단어는 '대표하는 전체 집단의 승리를 확보하기로 한 인물 안에서 인격적인 통일성을 함축했던 집합 개념'이다. 계속적인 계시 역사를 통해 볼 때 셈,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들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아이가 현재에 대한 하나님의 가시적인 보장과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계속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에게 결속된 모든 사람들이 받는 이익과 영적 물질적 축복의 대표자였다.
창세기 9:25-27
이 본문을 우리는 노아 언약이라고 한다. 어 구절들 중에서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구절은 27절이다.
(창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셈의 장막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야벳인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만 있지 주어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앞의 주어가 자연스럽게 이 문장의 주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한다'로 해석해야 문법적으로 바른 해석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렐리는 '축복의 계시는 복의 근원인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으로 대신되며 여호와께서 곧 복의 근원임을 증명하였다. 셈이 갖는 가장 큰 행복은 이러한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소유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12:1-3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
12:3절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손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통하여 우주적인 축복을 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동사가 창세기 18:18과 28:14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 재귀형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 단순 재귀형은 수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함이 옳은 것은 문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창 12:2의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아브라함의 인물과 결부되어 선포되었다. '너는 축복의 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축복의 전달자와 근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본, 바빌로니아 사본, 탈굼 사본 등에서 이 단수 재귀형 동사(니팔)가 수동형으로 해석되어져 있다. 또, 오스월드 알리스는 그의 논문 '아브라함의 축복'에서 이 단순 재귀형 동사가 수동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이 언약은 이후로 족장 시대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나타남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그 속에서 점진적 계시의 성격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W.C.Kaiser은 "자손이라는 말이 여전히 이 말의 중심적 핵심이 되겠으나 새로운 많은 특징을 더 가지고 있다. 창세기 13,15,17,22,24,26,28에서 그렇게 빈번히 반복되고 있는 사실 또한 구약 성경 신학자들로 하여금 그것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는 다른 이유를 제시하는 것인 줄 믿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언약은 자손, 종족, 가족, 인간, 땅과 관련되었고 세계적인 범위의 축복은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영원히 보증되었다"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19-20.
이것을 우리는 십계명이라 하기도 하고 시내산 언약 또는 모세 언약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언약 백성과 모세율법의 관계이다. '순종이 축복의 절대적인 조건'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출19:5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 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면"이란 말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이 조건에 대해 W.C.Kaiser은 "이 문맥에서 그것은 지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독특한 지위,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중재 적인 역할과 신분에 대한 조건이었다. 요약하면 그것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성결과 성직의 경험을 제한하고 곤란하게 하거나 무효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스라엘의 선택, 구원 또는 옛 언약의 현재나 미래의 계승에는 영향을 줄 수 없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나의 백성','나의 소유'라고 불리고 있다.
결국 십계명은 언약 백성이 언약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조건'문은 시내산 언약에서뿐 아니라 사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창 17:1에서 '행위 완전 하라', '내 언약을 지키라'등의 말이 나타난다. 사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6절에서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던 자임을 생각하면 이 조건처럼 들리는 이 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방도'임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 맥코미스키는 머래이의 글을 인용하면서 "고찰되고 있는 조건들은 수여의 진정한 조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믿음과 사랑과 순종이라는 단순히 냇가를 지불하는 행위로서의 응답이며, 계약의 복과 계약 관계를 누리는 일은 이것들을 떠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시내산 언약 부분에서 우리는 '나의 아들','나의 장자','나의 백성','나의 소유','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백성', '장막'등의 말들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약의 3중 공식 중 두 번째인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라는 말씀이 나타난다.
사무엘하 7:11-16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이다. 이 본문 자체에서는 '언약'이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삼하 23:5) 이 것을 언약이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언약'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아도 언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W.J.둠브렐은 "'언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리트가 삼하 7장에서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7장을 설명하는 부분인 삼하 23:5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삼하 6장과 7장에 대한 주석 역할도 하는 시 89:34, 132:12 등에도 베리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에 유의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왕이 될 자이며 그 왕국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창 3:15에서 '그', 아브라함 언약에서 '너','네 후손'이 여기서는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미 야곱이 그의 자녀들에게 한 예언 속에서, 특히 유다에게 한 예언에서 메시야의 '왕'직에 대한 것이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이 다윗 언약은 이전에 주신 아브라함 언약과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새언약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W.C.Kaiser은 다윗 언약의 내용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과거부터 조금씩 계시되어져 왔던 것임을 말해 준다.
참조로 다윗 언약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삼상 16-31, 삼하 1-24, 왕상 1-2장, 제왕 시로 알려진 시편 2,18,20,21,45,89,101,110,132,144:1-11 등을 참조해야 한다.
예레미아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 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언약'이라는 말이 구약 성경에서 여기 뿐이다. 예레미야가 새 언약이라고 했다고 해서 시내산 언약을 비판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즉 새로운 것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의 [13장 언약의 갱신:7세기]요약에서 밝힌 것을 참조하면 되겠다.
언약은 구약 성경, 더 나아가 신약 성경에까지 통일성을 제공해 준다.

2)신약성서 신학
신약성서 신학.
R. 불트만 저
허혁 옮김.
1. 예수 자신의 메시야 자의식에 대한 문제를 논하시오.
먼저 불트만이 말하는 메시야 자의식 문제를 요약하고 난 이후 이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 나갈 것이다.
불트만은 '예수 생애의 비 메시야적 성격'이란 항목에서 초대 교회가 '예수는 메시야이다'라고 믿은 것은 예수의 자의식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했다. 대신 '예수는 메시야이다'라고 믿은 초대 교회의 신앙은 예수에 관한 전승 자료에 기인한다고 했다.
나아가 불트만은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 장면(막8:27-30)은 이에 대해 어떤 반증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변모 사화와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 장면은 마가에 의해 예수의 생애에 삽입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세례 장면, 시험 사화 등도 전설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입성 사화는 전설적인 것으로 각색되었으며 예수의 수난 설화에는 다양하게 전설이 분포되어 있다. 또 예수의 삶과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트만은 계속하기를 바울 자신도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예수가 전통적 메시야 개념을(왕으로서의 메시야) 개조한 것은 아니라고 불트만은 이야기한다. - 다윗의 자손 문제(막12:35-37)와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 등에서도 예수가 전통적 메시야 개념을 개조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가 메시야에 대한 자의식도 가지지 않았고 나아가 메시야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개조한 것도 아니라면 '미래의 메시야'로 자신을 나타냈는가?라는 물음에서 불트만은 '아니다'라고 한다. 예수가 미래적 메시야로 의식했을 만한 예언들을 불트만은 사후 예언으로 돌린다. 또 불트만은 Q 자료 설을 도입해서 난관을 헤쳐 나간다.
그리고 '메시야의 비밀'론, 즉 예수는 메시야로서 활동했지만 그의 메시야됨은 부활때까지 숨겨져 있어야 했다는 것 이론을 불트만은 배격한다. 복음서에 있는 이 '메시야 비밀'에 관한 이야기는 전승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며 일축한다.
비판.
에수께서 자의식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는데 대한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불트만은 너무 비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가 자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성경 구절들은 모두 전설, 삽입, 신화, 전설화했다고 하는 것이 그 점이다. 너무나도 쉬운 방법을 택하고 있다. 자신의 생각에 거침이 될 만한 것은 모조로 삽입, 전설, 신화, 전설화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학자로서 안이한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또 불트만은 공관 복음서 뿐 아니라 바울 조차도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하지만 불트만은 이 책에서 공관 복음서의 내용 중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예수의 활동이 메시야적이었나 아니었나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구약과 연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구약에 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불트만은 구약과 신약과의 통일성을 부인하고 있다. 한편 불트만은 구약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전통적 메시야상, 즉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상에 호소함으로 잘못 되었다. 전통적 메시야상은 '왕'으로서의 메시야, 그것도 세상적 '왕'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으로서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야상과는 거리가 멀다. 또 불트만은 빌립보서 2: 6-11이 '예수의 생애는 메시야적 영광을 가지지 못한 단순한 인간의 생애로 파악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빌립보서 2:6-11은 예수의 생애가 메시아로서의 생애임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의 고난에 관한 예언들, 즉 사 52:13-53:12등을 보라. 메시야는 바로 고난받는 자임을 알 수 있다(여기에서 하나님의 종은 바로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불트만은 로마서 1:4 및 행 2:36의 의미가 '예수의 메시야 됨이 그의 부활 이후 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라고 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불트만이 오해 한것이다.
그것은 롬 1:4에 대한 박윤선의 주석을 참고하면 되겠다. 박윤선은 그의 주석에서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 이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다" 즉, 부활(불트만은 이 책 뒷부분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성도 부인하고 신화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에야 비로소 메시야가 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2:36은 어떤가? 이 구절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이전에는 메시야가 아니었다고 하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지금 베드로가 하는 설교 중의 한 구절이다. 베드로는 지금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바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 이심을 믿게 하려는 설교를 하고 있다. 이런 설교 와중에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는 메시야가 아니었고 십자가 처형 후에야 메시야가 되었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사도행전 2:36절의 이 부분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부활하심으로 더욱 '주'라는 칭호가 합당하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땅에 미천하게 계셨을 때도 '주'란 칭호와 '그리스도'란 칭호를 받으심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이제 부활 승천하신 뒤에는 그 칭호를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시다"라고 했다.
따라서 불트만의 생각에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또 불트만은 복음서를 역사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전승만을 중요시한다. 전승이 무엇인가? 어떻게 전승은 받아들이고 복음서는 받아들이지 않는가?
또 예수가 미래적 메시야로 의식 했는가란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하는 가운데 거슬리는 성경 본문을 '사후 예언'이라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불트만은 '사후 예언'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증명해 내지는 못했다. 또, 불트만은 난점에 대한 돌파구를 Q 자료에서 찾는다. Q 자료란 정말 있는 것인가? Q자료야말로 하나의 가정일 뿐이지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누가 Q 자료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가? 철저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이 아닌가.
또 불트만은 이 책 26페이지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복음서 기자들의 생각이 다르다고 했다. 나는 성령의 영감을 믿는다. 결코 복음서 기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나는 본다.
결론적으로 불트만이 말한 '예수님이 메시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 예수는 철저히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의식했고 메시야로서의 삶을 살으신 분이시다. 이에 대한 증명은 시간과 지면이 부족할 뿐이다. 참조로 불트만이 전설, 신화, 삽입이라고 했던 부분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메시야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트만의 생각과는 달리 초대 교회가 '예수는 메시야이다'라고 믿은 것은 철저히 예수의 메시야에 대한 자의식, 그리고 메시야로서의 삶, 교훈 등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봐야 정당하다.
2. 유대교에 대한 관계와 구약성서의 문제를 논하시오.
불트만은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다음과 같이한다."문제를 발생시킨 것은 사실 헬레니즘 계의 그리스도교가 구약성서를 받아들이고 그의 권위를 수긍했으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구약성서 율법의 구속력을 부정한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니 논박의 근거는 어떤 것이었던가? 역시 이 권위적 계시서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어 있는 율법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했던가?"
즉 불트만은 율법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해결책으로서 영지 주의, 바나바 서신, 히브리서신, 클레멘스 서신, 톨레미서신, 유스틴 서신을 고찰한 다음 종합적 파악을 시도한다. 종합적 파악에서 첫째, 제사-제의적 율법 제정의 종결을 다루고 둘째, 예언서로서의 구약성서를 셋째, 구약성서의 윤리적 계명들을 다룬다. 제사-제의적 율법의 종결에서 그는 구약성서의 율법은 그것에 제사-의전적 요구들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한도 내에서 패기된 것에 해당한다. 예언서로서의 구약성서에서 그는 두 가지 점의 의의를 제기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한 구약성서의 의의가 신탁서 라는 점에서 진(盡)한가라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구약성서의 본래의 의의는 스스로 종말론적 공동체이고 신에 의해 인도되는 역사의 종국이라는 의식을 생생하게 자신안에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인가?"
이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신약 공동체에 대한 구약성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구약성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불트만은 '히브리서'를 다른 서신들 수준에서 평가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엄연히 신약의 "계시"에 속한 것인 만큼 하나의 참고 자료나 비평 자료로 취급해서는 안되고 절대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볼트만의 히브리서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평가에 대한 것을 비판하고 한다. 여기서 그는 "바나바서와 공통된 것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이다"라고 했다. 불트만은 히브리서의 어느 부분이 알레고리적 해석인지는 밝히지 않고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히브리서가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나는 R.V.G 타스크의 말로 대신하고 싶다. 타스크는 그의 책 '신약에서의 구약'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 필로나 후기의 바나바 서신의 저자가 행했던 방식처럼 구약을 알레고리화 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구약을 상징적, 성례 전적, 혹은 대표론 적으로 사용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타스크는 왜 알레고리적이 아닌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Westcott는 이같이 말했다.즉 "모형과 원형 사이에는 각 사건이나 상황의 주요 개념에 있어서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상응이 존재한다" 알레고리에 있어서는 그러한 상응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특별한 저자의 상상이 해당 구절에 대한 특별한 적용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나는 불트만이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을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견해에 동의 하지 않는다. 또 그의 히브리서 7:18절에 대한 이해에도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는 이 구절이 구약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실상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요,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무익하여 폐했다'를 이해하는데 고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불트만이 인용한 1:18은 7:18-28의 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엣 계명'이 제사장직에 해당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전의 제사직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그림자로서 실제가 오신 오늘날에는 더이상 행할 필요가 없는 무익한 것이란 의미이다. 7:18의 본분을 가지고 율법 전체가 무익하다고 한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불트만은 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위한 모형적인 이 모든 준비가 사실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이해될 수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이 갖추어 졌는가?"라고 반문한다. 나는 어떻게 불트만이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지? 과연 불트만의 이 단정이 바른 것인지? 분명 예수님은 마13:17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 즉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예수님을 보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만일 불트만 처럼 이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찌해서 '그리스도'를 보고자 소망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트만의 그 단정은 옳지 않다고 본다.
3. 바울의 신학을 각 부분별로 요약하시오.
A. 신앙의 계시 이전 인간.
1. 인간학적 개념들.
§17 몸의 개념 -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Փ،ՌՁ"몸" 개념이다. Փ،ՌՁ 는 여러 다른 소재-육과 영-로 각인 될 수 있는 육체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Փ،ՌՁ는 인간의 본래 자아(영혼)에 외부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 자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육체와 인격으로서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Փ،ՌՁ 는 인간의 전인격(全人格)으로 표시되었다.바울은 한번도 죽은 몸, 시체를 Փ،ՌՁ로 부르지 않았다. 이 Փ،ՌՁ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와의 관계를 표현 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바울은 가끔 Փ،ՌՁ 와 ՓԼՑՎ 를 같이 사용하였는데 이때는 인간 속에 '나'와 제2의 '나'를 구분하였다. 제2의 '나'는 ՓԼՑՎ(죄와 관계된 단어임)의 지배를 받는다.
§18 혼과 영, 생명
속 사람(ץ ֽՓՙ ֨ՍՈՑՙՐՏs) - 본래의 '나', 즉, 죄의 몸, 죽음의 몸 등과는 반대인 본래적 '나'이다. 앞의 §117에서 제 2의 '나'가 아닌 본래의 '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혼(ՕԾ) - 바울에게서 인간의 온전한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Փ،ՌՁ와 결부된 혼(ՕԾ)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살전 5:23에서만 Փ،ՌՁ와 나란히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ՐՍՅՌՁ 도 사용되어서 3분법적 인간학의 나타내는것 같이 보인다. 바울은 이분법적 의미에서 몸과 혼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ՕԾ는 구약 성경의 ࠚ८ऽ와 같은 의미로서 생명의 힘 혹은 생명 자체를 뜻한다.
영(ՐՍՅՌՁ)- 바울은 ՐՍՅՌՁ를 ՕԾ 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영, 신의 영이란 표현에서는 ՐՍՅՌՁ를 사용하였다.
생명 - 인간을 나타나는데 Փ،ՌՁ, ՕԾ, ՐՍՅՌՁ 등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두 부분 혹은 3부분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산 통일체 즉 자기 스스로 대상이 될 수 있는 '나'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가지며 그것은 그의 의도 성에서, 밖의 것을 향해 있음에서, 원하는 것과 앎에서 생동한다.
§19 사유, 양심.
사유 - 인간 됨이 그때마다의 '나'임을, 그의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의 주체임을 뜻한다는 것은 ՍՏs라는 용어에서 가장 분명하게 잘 표현된다. 이것은 어떤 것에 관한 지식과 인간 자신에게 속해 있으면서 그의 태도를 규정하는 이해와 판단이다.
양심 - ՓՕՍՅԿՄՅՓՉs는 선과 악 그리고 이에 일치하는 하나 된 행동에 대한 지이다.
§20 마음
마음 - 바울은 ՊՁՑՄԿՁ"마음"을 널리 ՍՏs와 같은 의미에서 즉 원하고 계획하며 노력하는 '나'로서의 '나'의 표지로 사용했다. ՊՁՑՄԿՁ는 바라는 것과 욕심 내는 것, 원하는 것의 주체이고 결심의 주체이며 비애, 고통, 과 사랑 같은 것의 주체이다.
2. 육과 죄, 세계
§21. 창조와 인간
죄의 일반성 - 인간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이미 그의 본래의 존재를 상실했고 그의 노력은 처음부터 전도된 것,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바울의 특색이 부각된다.
창조자로서의 신 - 바울은 신 앞에 언제나 세워진 자로 인간을 본다.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은 동시에 신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적 가능성이다. 바울에게서의 신은 인간의 창조자이고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인격적인 신이다.
창조 - 세계(Պ՜ՓՌՏs)는 현존, 연재, 물존하는 세계로서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이다. 피조물(ՊՔԿՓՉs)은 피조성, 무상성, 썩을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창조는 특유한 이중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편 인간에게 쓰도록, 향유하도록 제공한 땅이고 반면 악한 마귀의 세력들의 활동 무대이다.
인간 - ֩ՍՈՑՙՐՏs"인간"은 대개의 귀절에서 그의 피조물 적인 인간성의 인간을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말했다. 인간은 피조물로 보여진 것이다. 모든 인간적 차별들은 신 앞에서 무산된다. 모든 사람들이 신 앞에서 마찬가지로 ֩ՍՈՑՙՐՏs"인간"일 따름이다.
§22 육의 개념
1. 악과 죄 - 악이란 전도된 '나와서 향해 있음'이고 전도된 노력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래의 존재인 ՆՙԾ를 상실한 노력이고, 그 선이 동시에 요구된 것인 까닭에 그것은 악한 노력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이다. 신을 거부하는 것은 곧 자신의 피조성을 오인하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에게서 생명을 찾는 것은 미친 짓이다.
2. 인간성과 지상적-자연적인 것의 영역으로서의 육.
ԳԼՑՆ는 먼저 인간의 물질적인 육체라는 의미에서 "육체"를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ՓԼՑՎ는 ՕԾ 및 ՐՍՅՌՁ 와 같이 인격의 표지로까지도 사용될 수 있다. ՓԼՑՎ 의 의미는 ՓԼՑՎ 가 인간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작용하고 인지될 수 있는 것 같은 인간의 본질을 표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것의 이 영역에 인간이 관계된 주변 세계도 관련시키므로 지상-자연적인 것의 전 영역을 뜻할 수 있다는 포괄성에서도 그것을 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대되었다.
ՓԼՑՎ 가 먼저 지상-자연적인 것과 나약한 것, 무상한 것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Ս ՓԼՑՊԿ라는 말투를 사용한 것은 "육체에서의" 삶이 비 본래적 삶임을 보여 준다.
3. 육안에 있는 죄의 기원
ՓԼՑՎ가 악마적인 본질로 생각된 것 같은 것은 없다. 심리적인 개념도 없다. ՓԼՑՎ는 여기서 감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ՓԼՑՎ를 향한, ՓԼՑՎ에 의해 규제된 행동이 죄된 것인 한 ՓԼՑՎ 에는 죄된 것의 근원이 들어 있다.
§23 육과 죄
1. 악덕과 열심으로서의 죄
피조물 적인 세계에 의지하고 살려는 죄된 환상은 반성되지 않은 경솔로, 반성된 사업욕으로, 윤리적 요구들에 대한 멸시로 또는 과장으로 또는 그것들을 실천하려는 열심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은 다 죄이다.
2. "욕심내다", "염려하다","자랑하다","신뢰하다"의 죄
위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자주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ՐՉՈՕՌԾՓՅՉs"욕심내다"는 죄이다. 성경은 Տ״Պ ִՐՉՈՕՌԾՓՅՉs"욕심내지 말라"고 한다. 이 ִՐՉՈՕՌԾՓՅՉs 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ՓԼՑՎ 이다.
ՌՅՑՉՌՍ֥Ս"염려하다"도 죄인데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에 대한 보장을 일구어 내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ՊՁՕ֥ՓՈՁՉ"자랑하다"도 하나의 죄이다. 이것은 신과 그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에게서도, 특유하기는 하나 그의 지혜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 자랑은 또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다.
ՊՁՕ֥ՓՈՁՉ ՊՁՔ֤ ՓԼՑՊՁ"육체를 자랑하다"와 동의어로 쓰이는 것은 ՐՅՐՏՉՈԽՍՁՉ ִՍ ՓՁՑՊԿ"육을 신뢰하다"이다.
3. 세력으로서의 육과 죄
ՊՁՕ֥ՓՈՁՉ, ՐՅՐՏՉՈԽՍՁՉ ִՍ ՓՁՑՊԿ"육에 대해 자랑하고 신뢰하는 일"의 이면에는 자기를 위해 스스로 염려하는 인간의 불안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육에 따라 사는 자는 ՓԼՑՊ 를 자기의 신으로 만든다. ՓԼՑՊ 와 ֠ՌՁՑՔԿՁ가 세력을 써서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이들에 관해 마치 인격적 존재, 이른바 악마적 지배자처럼 말할 수 있었다는 데서 특별히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언어가 육과 죄를 인간이 빠져 있는 세력으로 특징 지은 것이다.
§24 죄와 죽음
1. 벌로서의 죽음 - 죄가 죽음을 초래한다. 죽음은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이다.
2. 죄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죽음 - 바울의 육과 죄에 대한 사상들은 죽음을 형벌로 파악한 이 전통적 법적 파악을 넘어선다. 죄가 인간의 잘못된 노력이라면, 그리고 이 노력이 육에 따른 삶의 영위에서 즉 피조물과 지상-자연적인 것, 무상한 것에 속한 삶에서 일어난다면 죄는 내적 필연성으로 죽음에 이른다.
3. 모순된 표상들
위의 1번과 2번의 견해는 서로 균형을 잃고 있다. 특히 고전 15:45-49에 부합되지 않는다.
§25 죄의 일반성
1. 문제 - 죄의 세력은 인간을 완전히 지배한다는 점에 서뿐 아니라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점에서도 작용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여러 군데서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자주적인 노력으로부터 그를 탈취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2, 죄의 실제적 일반성
모든 인간이 범죄 했다는 바울의 진술은 철저하게 창조자를 배반한 원죄에 기인한다. 이 원죄는 현실적인 범죄로서 창조 때의 조상의 죄로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그때 그때의 현재에서 반복되는 배신의 원죄로 생각된다.
3. 아담의 죄
로마서 5장 12-19에서는 모든 인간의 죄가 아담의 죄에 소급된다. 즉, 여기서는 '상속죄'가 명시되었다.
§26 '세계'개념
1. 창조와 인간 세계로서의 세계 - Պ՜ՓՌՏS는 가 때로 한정된 의미에서 '세상'을 가리킨다(이때는 땅의 개념과 같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이런 의미에만 국한 되지 않고 오히려 지상 생활의 조건들과 가능성들의 총체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가 또 우주론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이라면 그것이 '인간세계', '인류'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수많은 귀절들에서도 같은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전체로 일컬어 질 때도 Պ՜ՓՌՏS 로 표시된다.
2.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세계 - Պ՜ՓՌՏS 가 여러 부분에서 Պ՝ՑՉՕs 또는 신의 영역과 대조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의 Պ՜ՓՌՏS 개념은 공간적 개념보다 시간적 개념과 더 밀접하다. 즉, 종말론적 개념이다.
3. 신화적 진술들 - Պ՜ՓՌՏS에 관한 종말론적-역사적 의미와 그와 함께 인간의 상황 즉 세력들 하에서 노예가 된 상황은 끝으로 이 세력들에 관한 신화론적 진술들의 해석에서 드러날 것이다. 신의 창조물인 Պ՜ՓՌՏS는 악마의 세력들의 지배 영역이다.
§27 율법
1. 율법의 요구 - 신의 요구는 구체적으로 Ս՜ՌՏs에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인간을 맞는데, 그것의 의미는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 외에 다른데 있지 않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요구하에 서 있다.
2. 율법의 구속사적 의미 - 율법에는 실천되도록 신의 요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율법은 단지 인간이 죄인임을 밝혀 준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을 생명을 제공하는 창조자에게로 인도한다.
3. 은혜로서의 율법 - 율법으로 구체화된 신의 요구는 바로 은혜이다. 그것은 신이 생명을 위해 율법을 주셨기 때문이다.
B. 신앙 하의 인간.
1. 신의 의
§28 의의 개념
1. 구원의 선물로서의 의 - '의'는 구원 즉 生命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죄가 죽음에 인도하는 것 같이 의는 생명에 인도한다. 의와 구원 사이의 연관성이 확고하고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 자체에 이미 구원 선물의 성격이 들어 있다.
2. 법적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의 - ՄՉՊՁՉՏՓ՝ՍՇ"의"라는 말은 윤리적, 법적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구원 조건 또는 구원 내용의 표지인 ՄՉՊՁՉՏՓ՝ՍՇ 는 법적 개념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 아니고 '관계'이다. 신의 의롭게 하는 재판 선고를 종말론적 심판에서 기대 했을수록 그만큼 더 의의 법정적 개념은 종말론적으로 되어 있다.
§29 의의 현재성
1. 의의 현재 - 바울에 의하면 ՄՉՊՁՉՏՓ՝ՍՇ 는 이미 현재에서 믿는 인간에게 선언되었다.
2. 현재적 의의 법정 화법적 의미 - 바울이 ՄՉՊՁՉՏՓ՝ՍՇ 의 현재성에 관한 자신의 주제로 법정적-종말론적 의미를 이 의에서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신이 믿는 사람에게 선포한 '의'는 윤리적으로 완전하다는 의미에서 '죄없음'이 아니라 '죄를 간주하지 않음'이란 의미에서 '죄없음'이다.
3. 현재적 의의 종말론적 의미 - ՄՉՊՁՉՏՓ՝ՍՇ의 현재성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는 구원사에 의해 '계시' 되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구원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바 신은 이를 통해 옛 세계 진행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대를 시작했다.
4. 현재와 미래의 문제 - 유대인들은 의의 개념을 희망의 대상으로 여기나 바울은 현재와 미래 동시적인 것으로 본다.
§30 신의 의로서의 의
1. 율법 없이 신앙으로 - 율법을 실천함으로서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바울은 말했다.
2. 신의 은혜로 - ՐԿՓՔՉՓ는 ՊՁ՝ՇՓՉs'자랑'에 대한 철저한 대립인 반면 ԼՑՉs'은혜'와 같이 쓰인다.
3. 신의 의 - ՄՉՊՁՉՏՓ՝ՍՇ는 오로지 신의 ԼՑՉs 에만 그 근거를 두고 있다.
§31 화해
ՄՉՊՁՉՏՓ՝ՍՇ 개념 대신 ՊՁՔՁՋՋՁՃԾ'화해'의 개념도 신 자신이 인간에게 열어 준 새로운 상황의 표지로 사용된다. ՊՁՔՁՋՋՁՃԾ'화해'를 통해 분명히 된 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2. 은혜
§32 사건으로서의 은혜
1. 신의 진노 - 신의 진노는 언제든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 위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는 자이다.
2. 신의 행위 및 사건으로서의 은혜 - 신의 ԼՑՉs 는 은혜의 심판자적 행위로서 좀더 정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이 이제 결심한 취급 방법이 아니라 한번 행한 행위이고 그것을 그대로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곧 신의 종말론적 행위이다. ՐՍՅՌՁ 를 믿는 자들이 옮겨진 새로운 상황도 ԼՑՉs'은혜'로, 신의 행위의 관할 영역으로 표시될 수 있다.
3. 신의 사랑 - 바울은 ԼՑՉs와 같은 의미에서 ֢ՃԼՐՇ'사랑'을 말 할 수 있다. 물론 ֢ՃԼՐՇ 보다는 사랑에 대해 덜 강조되어 있다.
§33 구원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1. 구원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수육 - 구원 사건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포괄한다. 수육에는 죽음과 나란히 독자적인 의미가 부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행위의 통일성을 이룬다.
2. 문제 - 이 사건이 어떻게 은혜의 행위로서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경험들 수 있는 가이다. 신앙의 방법 이외에 다른 근거가 없다. 결국 역사적 사실로서 부활을 말할 수 없다.
3. 개념성들
a) 속죄제물 - 예수의 죽음은 그의 피로 세워진 속죄 제물이고 그의 피로 작용하는 속죄 수단이다. 속죄 제물을 통해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다시 말해서 죄들로 이루어진 채무가 도말 된다고 믿었다.
b) 대속제물 - 속죄 제물 사상과 극히 유사한 것은 대속 제물 사상인데 이것도 역시 제사법정 용어 사유의 영역에서 생긴 것이다.
c) 속량 -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죄에 대한 벌에서 속량하는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속죄 제물의 개념과 같다. 하지만 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 함도 포함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책 즉 범죄 함으로 정해진 형벌을 도말 하는 제물일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세력들인 율법과 죄, 죽음에서 자유 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d) 밀의종교적 죽음 -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위와 같은 작용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밀의 종교의 신의 죽음에 유비시켜 묘사한 귀절들에서 대답되었다. 여기서 밀의 종교적이란 것은 세례와 성찬을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e) 영지주의적 신화 -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지주의적 신화의 규범들로 해석했다. 영지주의적 사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생각된 구세주와의 통일 즉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4. 두 신앙의 개념 - 바울의 진술들을 재생시키면 본래 신앙의 행위와 동시에 신앙 개념을 각기 둘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첫째는 선재적 신의 아들의 수육 및 십자가형에 관한 보도 사실과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의 부활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에서 신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보는 신앙이고 둘째는 신의 은혜에 대한 신뢰로서 지금까지의 인간의 자기 이해를 철저히 바꾸어 놓는 것 즉 자랑의 철저한 포기를 뜻한다.
5. 그리스도 승인과 새로운 자기 이해에서의 신앙의 통일성 - 구원 사건의 선포가 '신가 화해하라'는 말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구원 사건이 어디서도 선포하고, 말을 걸고, 요구하고, 약속하는 말에서 현재 한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구원 사건의 선포는 본래의 신앙 요구에 선행하는 예비적 가르침이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 선재 및 수육, 부활
a)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 사건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선포함으로 되어 지는 것이다.
b) 선재와 수육 - 그리스도의 선재와 수육은 신화 자료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케리그마에 연결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일했다고 되어 진 것이다.
c) 부활 -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는 부활한 자를 주로 승인하는 신앙 이전에 통찰될 수 없다.
§34. 말, 교회, 성례
1. 말에 현재 하는 구원 사건 - 구원 사건은 선포의 말에서 현재 한다. 선포된 말은 일반적 진리들로 유포되는 계몽적인 세계관도, 결정적인, 그러나 지나간 사실을 브리핑 식으로 '회상한' 단순한 역사적 보도도 아니다.
2. 교회에서의 현재 - 설교의 말은 '교회', '부름 받은 자들', '거룩한 자들', 공동체를 만든다. 교회가 설교에 의해 부름을 받은 것같이 그 실존은 다시 설교의 근거가 된다. 이 공동체는 신의 성전으로서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주변 세계로부터,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악한 자들로부터 분리되었다.
3. 성례에서의 현재 - 개인은 세례 성례에 의해 주의 몸에 받아들여진다. 세례는 수세자 측에서 볼 때 고백하는 신앙 행위이다. 바울의 경우 주의 만찬에 대한 파악에서도 밀의 종교적 표상들이 구원 사건에 관한 그 자신의 견해와 비슷하게 결합되었다.
3. 신앙
§35 신앙의 구조
1. 순종으로서의 신앙 - 바울은 ՐԿՓՔՉs를 무엇보다도 우선 ײՐՁՋՏԾ'순종', 즉 순종 행위로서의 신앙 행위로 이해한다. 그래서 바울은 소식을 신앙할 것 즉 순종할 것을 강조한다.
2. 고백으로서의 신앙 - ՐԿՓՔՉs 는 언제나 그 대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의 구원 행위에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고백, 즉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고백과 결부된다.
3. 희망으로서의 신앙 - 그리스도인이 자기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릴 때 ՐԿՓՔՉs는 곧 ִՋՐԿs가 된다. ՐԿՓՔՉs는 정지적 개념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개념이다.
4. 두려움으로서의 신앙 - ՐԿՓՔՉs 는 ִՋՐԿs 와 관계하나 여전히 Ֆ՜ՂՏs'두려움'과도 관련된다. ִՋՐԿs 는 Ֆ՜ՂՏs 와 연결된다. 신앙이 ִՋՐԿs이기 때문에 또한 Ֆ՜ՂՏs 이기도 한것이다.
5. 신뢰로서의 신앙 - 신앙은 또한 '신뢰'이다. 즉, 신의 구원 행위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데 그 근거를 둔 신뢰이다.
§36 신앙에서의 삶
1. 신앙의 개인주의화 - 인간이 신에 대한 관계로서 ՐԿՓՔՉs 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규정한다. ՐԿՓՔՉs는 믿는 자의 개인적인 행동들에서 구체적인 생활로 실현된다.
2. 믿음의 전개 - ԼՑՉՓՌՁ'은사'는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인식은 ՐԿՓՔՉs의 특별한 운동으로서 ԼՑՉՓՌՁ, 즉 영의 은사이다. 이것들은 믿음의 삶에서 펼쳐진다.
3. 그리스도 안에 있음 - '그리스도 안에'란 말투도 개인적 역사적 삶의 명백성을 위한 표지의 의미를 얻게 된다. 구원 행위 및 신앙에 의한 삶의 이 근본적 규정성이 세부적인 데까지 어떻게 미치는가는 '그리스도안에' 및 '주안에'라는 말투가 자주 사용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37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신앙
ՐԿՓՔՉs는 선포된 말의 대답으로서 종말론적 사건에 속한다. ՐԿՓՔՉs는 가능성으로 새로이 열린 구원의 길이다.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과 '새로운 피조물'을 비교하면 사랑에서 작용하는 신앙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존재가 종말론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4. 자유
§ 38. 죄에서의 자유와 영에서의 생활
1. 서술과 명령 - 자유는 믿는자가 '대전으로 빼낸 자'로서 이미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는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을 이미 자신의 염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 염려를 버리므로 자신을 철두철미 은혜에 맡기고 자신을 신 내지 주의 소유로 알면서 그를 위해 살 때 풍성해진다.자유는 죄의 강압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그리고 영을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된다.
2. 미래 적인 것의 능력으로서의 영 - 신자가 영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 자유가,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의 자유가 선사되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영은 ՓԼՑՎ의 대립 어이다. 영은 비 세계적인 것과 불 가시적인 것, 이용되지 않는 것, 그의 생을 '영을 따라' 영위하는 사람에게 또 그 속에서 힘이 되는 무상하지 않는 것의 총괄 개념이다.
3. 힘과 규범으로서의 영 - ՐՍՅՌՁ이 신앙에서 선사된 힘으로도, 삶의 규범과도 결부되어 있다.
4. 기쁨 - ՐՍՅՌՁ의 열매 중 하나가 ՁՑԼ'기쁨'이다. 이 기쁨은 종말론적인 것인데 때마다 그것으로 결합된 자들의 상호관계와 서로 위하는 관계로도 실현된다.
§39. 율법에서의 자유와 인간들에 대한 자세
1. 율법에서의 자유 - 율법에서의 자유는 곧 전승된 율법 내에서 그 내용에 따라 타당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를 구별하는 자유로 실현될 것이다.
2. 그리스도교의 권위 - 그리스도교의 ִՋՅՕՈՅՑԿՁ'자유'에서 흘러나오는 ִՎՏՕՓԿՁ'권위'는 '모든 것이 나에게 가하다'에서 표현된바, 이것은 그것이 율법의 의전적 제의적 계명들도 포함하는 모든 세상 적인 요구들에 예속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것은 저 독자적인 ՄՏՊՉՌԼՆՅՉՍ'검토'에서 존속하는 전권이며, ֢ՃՁՈ՜Ս'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발견하는 권리이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양심의 판단에 예속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3. 사랑 - 사랑은 종말론적 현상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순수한 존재로서 사랑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자에게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때문에 '이미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고 부활한 자를 위해 사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40. 죽음에서의 자유
1. 미래의 생명 - 율법과 죄에서의 자유는 곧 죽음에서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생명은 유대교 및 초대 기독교적 가르침 그리고 묵시문학과 일치한다. 육체적 죽음 피안의 부활의 생명으로서 미래 적인 것을 의미한다.
2. 현재의 생명 - 어떤 의미에서 생명은 또 현재적이다. 그것은 신앙을 통해 자기의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3. 세계에서의 자유 - 세계와 그 세력들에서의 자유는 죽음에서의 자유와 함께 주어졌다.
자유와 의와 생명은 그 근거를 신(神) 안에 두고 있다. 신의 영광은 최종 목표이다.
4. 요한의 역사적 위치를 말하시오.
요한의 역사적 위치는 먼저 공관서와의 관계, 바울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후 요한의 특수성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1) 공관서와의 관계
요한이 공관서에 있는 것들을 알고 있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요한은 개작된 전통 즉, 몇몇 이적 사화들, 수난 사화들의 개작된 것을 알고 있었다.
<공관서와 요한과의 비교>
공관복음 |
요한복음 |
|
1, 질문에 대한 답변 |
로기온을 사용했다. |
긴 담론, 둘러대는 대화, 이중 의미적 개념 |
2, 화제가 된 주제들 |
랍비로,예언자로도 나타난다. |
랍비, 예언자로 나타나지 않고 신이 보내신 계시자로만 나타난다. |
3.특징적 비유('나는...이다'형식) |
없다. |
있다. 예) 목자(10장), 포도나무(15장) |
4. 초기 공동체의 문제들, 신앙 |
반영되어 있다. |
반영되어 있지 않다. |
(2) 바울과의 관계
요한과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들을 달리고 있다. 요한이 어느 정도 초대 공동체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는 바울보다 후에 속할 것이다. 비록 종교사적으로 바울과 요한 사이에 공통성이 존재하며,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울의 세계와 요한의 세계는 다르다.
분명한 것은 요한이 바울 학파에 속하지 않고 바울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그는 독창적 인물이고 신학적 사유상 다른 분위기에 서있다.
< 바울과 요한의 비교>
바울 |
요한 |
|
1, 바울적 토론 |
있다. |
없다. |
2, 특수한 바울적 용어 |
있다. |
없다. |
3. 바울의 인간학적 용어 |
있다. |
없다. |
4. 구원사적 관점 |
있다. |
없다. |
(3) 요한의 특수성
요한의 복음서는 근동(近東) 그리스도교의 것이다. 복음서가 셈어와 관계없이 헬라어로 기록된데 비해 요한 복음은 셈어화(문체상, 문법상) 되어가는 헬라어였다. '나는 ...이다'라는 문체적 양식으로 계시 담론 적인 전제인 이원론적 기본 사상(二元論的 基本思想)이 표현된다. 또 여기에는 담론들을 관철시키는 반립 개념들도 나타난다(예, 빛-어두움).
바울에게 있어서 지상의 예수가 노예의 모습으로 나타난 선재 자로서 모든 신의 영광을 상실했다면 요한에게서는 수육한 로고스로서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
요한의 경우 예수의 모습은 전적으로 영지 주의의 구세주 신화가 제공한 양식들에 의해 그려졌다.
5. 요한의 신앙관을 요약하시오.
§ 49 말을 들음으로서의 신앙
1. 들음과 봄으로서의 신앙
요한 복음의 기록 목적은 20:31절에 나타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
그와 그의 말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의 말들도 신앙의 대상으로 일컬어 질 수 있다. 그리고 말들과 동일한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앙과 들음, 봄의 병행성 및 동일성은 이미 그 봄이 가령 신비적 관조가 아님을 보여준다.
2. 인식.
봄은 신앙의 고유한 인식이다. 신앙은 인식하는 신앙일 때에만 참 신앙이다.
§50. 종말론적 실존으로서의 신앙
1. 비세계화로서의 신앙
요한도 바울처럼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처럼 구원에 이르는 길을 논제로 삼지 않고 오히려 구원 자체를 논제로 삼는다. 신앙의 요구는 세상 자체의 척도들과 판단들, 지금까지의 자기 이해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2. 신앙의 안정성
요한은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기록함으로 신앙의 안정성을 말한다.
이 신앙의 안정성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이다.
3. 종말론적 실존
신앙은 비 세계화이며 종말론적 실존으로 넘어간다. 믿는 자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4. 사랑의 계명
소극적으로 신자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죄를 지향해서는 안된다). 적극적으로 신자는 이 세상에서 빛 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주님을 뜻을 실천(세상을 사랑하는 일) 해야 한다.
5. 평화와 기쁨
종말론적 실존은 평화와 기쁨으로 표시되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종말론적 구원을 묘사한다. 셈어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은 바로 구원이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6. 계시자에 대한 관계
종말론적 실존은 믿는 자들의 존재가 계시자 안에 있는 존재로서 또는 그들 상호관계의 존재로서도 묘사되면서 서술된 때문에, 그들 서로 또는 계시자와 결합되어 하나를 동시에 아버지와도 하나를 이룬다.
7. 영
종말론적 실존의 척도는 하나님의 영의 소유이다(요 4:13). 요한에게서의 영은 이적을 일으키는 세력 또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힘도 규범도 아니고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인식과 말 선포의 능력이다.
8. 공동체
요한은 '공동체'를 간접적으로만 언급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공동체와 관련된 것은 요한 3서 6장 9-10절 외에는 없다. 이것도 개체 공동체를 표시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공동체는 "不可視的인 교회"로 생각되었다.
6. 요한이 본 종말론적 공동체와 교회의 질서에 대해 서술하시오.
§ 51. 종말론적 공동체와 교회의 질서.
1. 솜과 하르낙의 토론
솜(Rud. Sohm)과 하르낙(Ad. Harnack)은 교회 공동체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었다. 솜은 교회 법은 교회의 본질에 상충된다고 했고 이것은 바로 교회의 타락이라고 했다. 한편 하르낙은 교회 법은 교회의 본질에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교회 속에 내포된 것이라고 했다.
2. 공동체의 자명성
솜과 하르낙의 견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교회와 영의 지배에 의해 이끌어지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솜과 하르낙의 이 토론은 교회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교회의 자기 이해가 실제상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개체 공동체들의 질서 성립도 종말론적인 공동체로서의 공동체의 자기 이해에 의해 규정되었다.
3. 영과 법
법이 아니라 영의 지배로 구성되는 공동사회로서의 교회에 관한 솜의 견해는 타당하다. 그러나 법질서가 영이 지배에 배치된다거나 영에 의해 법질서가 만들어 질 수 없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솜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영에 대해 혹은 영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영과 전혀 대립되지 않고 오히려 영과 부합한 공동체의 법 질서가 제대로 유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가?를 물어 봐야 한다.
7. 요한이 말하는 교회 질서의 성립과 발전 단계를 논하시오.
팔레스틴 초대 교회에서도 헬레니즘 계의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도 처음에는 교회의 질서들과 직책들의 제정에 관한 반성이 없었다. 처음에는 유대교 공동체의 질서들 안에 머물렀으나 곧 세례와 성만찬에 의해 유대교에서 그리스도 공동체가 구별되었다.
교회에 처음에는 직책 자들이 없었고 대신 권위적 인물들, 예를 들면 팔레스틴계 공동체에는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가, 헬레니즘 계의 공동체에는 '사도들'이 지도를 했다.
얼마 안 가서 '장로'의 직책이 팔레스틴 초대 교회에 나타났다. 이방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장로'와 '감독'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장로, 집사란 의미는 이방 세계에서 분명히 '직책'을 의미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또는 개인적인 권위 때문에 개인들에 의해 받아 들여졌던 인물들이 차츰 기능들을 위해 임명된 인물들로 변했다.
공동체의 직책 자들(장로, 집사, 감독등)과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들(예, 사도, 예언자, 교사)사이의 차이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차이는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들은 전체 교회를 위한 자들인 반면 직책 자들은 개 공동체만을 위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들이 없어져 갔고 직책 자들이 그 의무를 떠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사도직에서 교회의 직책으로 나아간 것이다. 따라서 그 업무는(말의 선포 기능) 계승되는 것이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감독들 및 집사들을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그들의 후계자들을 위해 힘쓸 것을 부탁했다. 이후 직책이 교회를 구성하는 직책에 해당하게 되었다. 직책은 중단 없는 계승으로서 사도들에게 소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말 대신 성례가 중심을 이루면서 사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제사를 집행하는 인물들이 사제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으며 신약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모순된 사제들과 평민들의 구별이 수행되었다. 이때부터 잘못된 직책이 출현한 것이다.
끝.
